케이스보단 본체를

내가 쓴 가면은 무슨 색깔일까.

by 양지음

전문적으로 사진 찍는 걸 배우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드는 풍경 찍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내가 가진 프레임 안에 예쁘게 잘 담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성취감까지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핸드폰을 바꿀 때면 그다지 많은 기능을 쓰지도 못하면서 최신 핸드폰을 사곤 합니다. 다른 것보다 최신 폰에만 있는 카메라 기능을 쓰고 싶은 욕심에요. 공부 잘하는 애들은 필기구 탓을 하지 않는다던데(웃음) 저는 사진을 ‘잘’ 찍진 못하니까 도구라도 좋은 걸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새 핸드폰을 살 때면, 늘 마주하는 색상 고민. 사실 뭘 사도 비슷할 거 같고 다 예쁜 색들인데도 고르려고만 하면 왜 그렇게 고민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폰과 똑같은 색은 또 피해야 할 거 같고, 분홍 색상을 하면 또 너무 공주스러워지는 걸까 싶은 구시대적인 발상도 들고, 때로는 이제 곧 가을, 겨울인데 하늘색은 추울까 하는 조금은 우스운 고민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나름의 긴 고민과 여러 타협점을 거쳐 겨우 한 가지 색상으로 마음을 정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됩니다. 요즘은 무언가를 사는 일조차도 얼마나 간단하고 편리해졌는지, 핸드폰 구입이란 쉽지 않은 일마저도 간편해졌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물론 얼마나 더 싸게 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느라 발품 파는 일은 전혀 간편하지 않지만요.)


그렇게 올해 4월 새롭게 구입한 핸드폰을 잘 쓰는 중이었습니다. 일명 ‘뽑기운’이 조금 부족해서 카메라가 완전히 괜찮은 녀석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다 얼마 전 핸드폰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케이스에 흠집이 좀 남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핸드폰 본체에도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케이스를 급하게 벗겼는데,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 오래된 시간도 아니고, 지난 4월 구입한 핸드폰의 색상을 제가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요.


저는 제가 새로 산 핸드폰이 분홍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요, 하늘색 케이스를 벗기고 보니 조금은 투명해 보이는 영롱한 하늘색 본체가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의 핸드폰 직전에 쓰던 핸드폰이 짙은 분홍색이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핸드폰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아 케이스를 살 때, 핸드폰 색상과 맞춰 하늘색을 골랐던 기억까지 함께. 그러고 나니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잊어버릴 색상을, 그땐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던 걸까 싶어서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깨달음은 다른 데서 울려왔습니다. 나는, 케이스 속에 가려져 헷갈렸던 핸드폰 본체의 색상처럼 나 자신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씌워놓은 케이스 때문에 본체의 진짜 빛깔을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요. 여태껏 계속 분홍 빛깔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하늘색 영혼을 가진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울렸던 것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씌운 케이스는 어쩌면 ‘가면’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면은 얼마나 종류가 다양한지, 진짜 내 성격과는 다르게 조금은 순화된 사회적 성격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일 수도 있고, 또한 내가 가진 모든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방어막이면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견고해지는 건 무엇이든지요.


이런 가면은 사실 참 유용하고 안전해서, 그 뒤에 가려진 본체가 다치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이번에 제 핸드폰을 대신해 흠집이 생긴 폰 케이스처럼요. 그러나 그렇게 언제 어디든 본체를 보호하며 함께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인가부터는 본체의 모습을 대신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즈음의 제가 자꾸만 답답해지는 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그 가면의 색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본체의 빛깔을 대체하기 시작해서가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제가 쓴 사회적 가면 또한 제 폰 케이스처럼 어딘가에 부딪혀 흠집이 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앞으로의 삶은 더욱더 충실히 ‘본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제 한 번쯤 가면을 벗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더 이상은 본체의 색깔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이자 걱정의 목소리로서.


지금 당장은 가면에 생긴 흠집이 속상해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르겠으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깨닫게 될 거라 믿어봅니다. 그 가면은, 본체를 지키기 위한 케이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가면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면 드러나게 될 본체가, 훨씬 더 맑고 영롱할 수 있도록 케이스가 아니라 본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더불어 더 이상 맞지 않는 케이스는 언제든 바꾸어 끼울 수 있는 권리이자 선택권이 ‘본체’에겐 있단 사실을, 케이스가 부서질 때마다 기억하기를 바라보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