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시즌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1월 중순? 즈음부터 시작되었지만, 휴직이라는 핑계로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얼마 전 뒤늦게 누락된 서류들을 떼러 병원들을 돌아다녔다. 취업 첫 해에는 선배들이 넌 신경 안 써도 돼서 좋겠다, 부럽다고 얘기하는 말에 그저 웃으며 지나갔고, 둘째 해부터는 조금씩 방법을 배워 준비했던 연말정산. 작년까지도 크게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올해 들어 세 번째 연말정산을 준비하다 보니 조금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난해 돈을 어디에 많이 썼는지가.
작년 한 해는 하반기 몸이 아픈 걸 시작으로 마음도 안 좋아져 병원에 간 내역이 참 많았다. 사실 다른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전통시장, 대중교통 이용금액 등이 아니면 세부사항이 보이지 않는데 의료비 내역이다 보니 더 눈에 띄는 걸 수도 있긴 하다. 그래서인지 누락되고 수정해야 할 사항도 유독 의료비와 관련된 부분에만 쏠려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래도 1년이 지나 이렇게 한꺼번에 내 소비내역을 확인해 보니 작년 한 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참 귀찮고, 준비하려면 신경쓸 게 은근히 있어 안 하고 싶은 연말정산이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국세청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한번쯤은 꼭 짚어볼 일이구나 싶다면 조금 오버일까.
바로 며칠 전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의 강의를 몇 개 보게 되었다. 그 중에는 ‘10분 만에 무기력증을 없애는 방법’이란 동영상도 있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무기력증은 여전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만 그 에너지를 쓸 방향을 잃어 무의미한 일을 하는 상태라고 한다. 의미란 건 에너지가 쓰일 방향을 만드는 거라는데,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내 삶의, 혹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찾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얘기하셨다.
그런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으려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일순간에 무기력해질 수도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지속해온 의미의 가치가 훼손될 때라는 것.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결과가 그와 상관없이 나타나서, 이유를 모르는 결과를 계속 만나면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어 무기력해진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난 한 해는 내게 있어 이유를 모르는 결과를 계속 만나게 되는 잔인한 한 해였음을. 첫 2년 동안 고생하면 그래도 다음 발령지는 어느 정도 내 의사와 비슷하게 가리란 믿음은 누구보다 처참히 깨져 나는 더 힘든 자리로 발령이 났고, 2019년에 정말 있는 힘껏 일했지만 2020년에 그에 대해 매겨진 성과평가 결과는 최저등급이었으며, 우리 집 막내였던 강아지는 내 잘못된 선택 때문인지(그때 당시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던 선택들이었음에도...) 갑작스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럼에도, 울 새가 없었다. 정말 너무 바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나는 심지어 막내였으며, 그런 상황을 이해해 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또래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렇게 더 살아서 뭐하지...’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이미 하고 있었던 건,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완전하게, 삶에 대한 통제력이나 노력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에.
요즘도 여전히 나는, 꿈속에서 나보다 나아진 환경에서 일하는 후임의 일을 도와주러 사무실에 출근하고 지난날 나의 고됨을 속상해하며 ‘이 정도 환경만 되었으면 내가 쉬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깨닫는다. 지금 이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내게 꼭 필요했음을, 이 시간이 참 소중하고 감사함을. 지난날 그 감정들 또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가 시작된 지금, 꼭 한번 연말정산을 할 필요가 있었음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울어본다. 차마 울지 못해 괜찮은 척했던 어제의 나에게 빚진 감정들을, 이제라도 조금씩 갚아보려고. 이 정산이 끝날 때 즈음엔 다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새로운 감정으로 내 삶을 따뜻하게 바라봐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