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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음 Jul 24. 2021

그건 제 잘못이 아닌데요.

바닷바람에 날려온 면죄부

 제주도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삼다도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제주 공항 근처 동네를 시작으로 왼쪽으로 돌아 서귀포를 찍고 다시 동쪽으로 올라왔던 내 여행은, 마지막 거처였던 동북쪽 해안가에서 바람의 절정(?)을 맞았다.


 처음 월정리 버스정류장에 내려 해안가를 구경하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속절없이 휘적거리는 가게 앞 풍선인형처럼 바람에 쉴 새 없이 머리카락이 휘날렸던 그때를. 분명 서귀포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멀쩡했던 머리는, 이미 소가 한 번 핥은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엉겨 붙어 버린 채였다.


 서쪽에서도 바닷바람은 어느 정도 맞아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싶어 새삼 놀랐다. 모발이 얇고 힘없는 내 (앞)머리는, 가까스로(?) 바람을 피한 카페에 도착하고 나 보니 물결치듯 하늘로 뻗어 있었다. 평소에도 좋아하지 않는 앞머리 뻗침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래도 여행이라 셀카 한두 방 정도는 찍고 싶은데 속이 좀 상했다.




 습기가 많은 곳에 가면 갈수록, 길이가 길면 길수록 평소에도 쉽게 뻗치던 앞머리였다. 그래서 그날 하루 종일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루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씻을 때가 되면 내 이 앞머리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대망의 앞머리 처형(!)식. 니 죄를 니가 알렸다! 하고 힘차게(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덜덜거리며 조심히. 차홍 님이 가르쳐 주시는 방법대로 소심하게 앞머리를 모아 잡고) 눈썹 칼로 앞머리를 잘랐다. 분명 혼자서도 잘 잘랐던 앞머리였는데, 이번엔 망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까지 셀프 커팅이 망한 적 있었나 싶을 만큼 망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길면 바람에 날릴 거니까 조금만 더...! 하다가 반달이 초승달 된... 또르르...


 말리면 괜찮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말리니까 더 짧아졌다. 아... 얼굴 예쁜 애들만 어울린다는 처피 뱅이 웬 말인고... 그치만 얼마나 넋이 나갔으면, 그게 또 그 밤 중엔 나름 괜찮아 보였다. 숙소 형광등이 뭐가 문제가 있었나... 어쨌든, 그래도 이제 바람에 휘날려서 뻗치는 앞머리 볼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내일부터는 앞머리를 어떻게 잘 정리해서 셀카도 좀 찍어봐야지.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응, 잘못은 앞머리가 아니라 바닷바람이 했네.

 그다음 날이 돼서야, 함덕 해수욕장에 가서야 깨달았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니가 문제였다는 것을. 애당초 길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습기 많은 바닷바람에 앞머리는 뻗칠 수밖에 없었던 거였는데.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우는 내 탓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울린 니 탓일 수도 있었구나.


 그치만 어쩌겠는가. 이미 잘린 앞머리는 화장실 휴지통에 처박혔고, 뻗친 처피 뱅으로 웃고 있는 나는 여전히 갈 곳이 많은 여행객인 걸. 억울하게 처형당한 앞머리와 함께 울고만 있기엔 내 여행이 너무 아쉽고 소중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후련했다.  한결 더 못 생겨진 얼굴로 돌아다녀야 하는 슬픔 덕분에 좋은 배움도 얻어서였을까.


때론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내게 책임이 없는 일이, 내게 책임을 물을 때가.

 나는 늘 무슨 일이든 내 탓인 줄만 알았다. 그렇게 밖으로 돌리지 못한 화가 마음에 꽂혀 끊임없이 나 자신을 힐난하고 질책했다. 그 분노가 가라앉지 못해 결국 마음에 물기를 만들었고, 우울은 내게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길 잃은 분노로 잘려나간 앞머리가 말해주는 듯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그래. 어쩌면 지금 울고 있는 것은, 내가 나약하거나 문제여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와 맞지 않는 환경,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면죄부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죄 없는 죄인에게 하사된 면죄부.


 힘없고 얇은 반곱슬 모발을 갖고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어 미용실을 다녀왔음에도 자꾸만 나를 뻗치게 만드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땐 말해주자.

 

네 잘못이 아니야.
여기가 바닷가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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