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생각 없이 귓바퀴를 털었다. 잔모래가 떨어져 나왔다. 조금 전 낮, 해변가에서 바람에 휘날리던 모래 알갱이들이 아마 귀에 안착했나 보다. 한 달짜리 여행을 시작하며 거창한 계획은 없었지만, 그래도 많이 걷겠다는 것 하나만큼은 굳은 다짐을 하고 온 터라 나는 나름대로, 되는 대로 꽤 많이 걷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걸어서 여행을 하다 보니 길 위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차를 타고 다녔다면 볼 수 없었을 많은 것들, 특히나 햇살, 바람, 바다와 같은 자연 풍경이 참 많은 걸 느끼게 해 주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눈길을 더 잡아끌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보다 옷차림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여행 목적을 알 수 있다는 걸, 나는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깨닫게 되었다. 예쁜 원피스를 입었는지, 아니면 라이딩 복장을 하고 있는지, 혹은 걷기에 가장 편안한 옷을 입었는지.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가 그의 태도와 마음을 결정짓고, 또한 그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렴풋하게나마 그 목적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옷차림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복장은 지금,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여행의 목적이 뭐라고 인식하게 하는지. 스스로에 대한 사진을 찍고 예쁜 곳을 가고 싶은 관광인지, 올레길을 순례하기 위한 여정인지, 아니면 그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인생의 여행자 모드인지.
그러나 아무도, 그걸 가늠할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이 여행의 주인공인 내가, 이미 그걸 모르고 여행을 왔으니까.
계속 차를 타고 다니거나, 잠깐 어딜 가는 일정이 아니면 죽어라 편한 옷만 고집하는 나는, 나름 패션에 신경을 쓰고 싶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행만 하면 정말 죽어라 패션 테러리스트가 된다.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간절한(!) 소망을 반영하여, 매번 옷마저 얼굴빛과 함께 죽어가는 어두운 무채색으로 무장한다. 여기에 내 콤플렉스인 근육형 종아리를 가려줄 긴 바지 패션 공식까지 합체하면, 이제 완벽한 패션 테러 준비가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대환장 파티의 어느 와중에 내가 이 여행의 목적을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어떤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조용히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더 화두였던 내게 그건 어쩌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의 많은 순간, 자꾸만 더 주눅드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날들. 자신감이 더 줄어든 게 살이 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나는, 그보다 자신감이 생길 만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외면적인 모습을 보고 타인을 평가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아무렇게나 봐달라고 아주 크게 떠들어대고 있었다는 걸.
사람들이 더 이상, 목적 없는 여행이 나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게, 그래서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인식하고 대하기 전에, 이제는 그만 내 이야기를 해야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여행을 하고 싶어 여기에 왔다고, 그러니 부디, 그대도 나를 그렇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저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렇게 오해가 쌓이지 않은 채로 누군가에게 나란 사람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 나의 모습을 소중히 하나씩 쌓아서, 정말로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키워 갔으면. 그렇게 여행을 살아가는 태도로, 인생을 여행해 나갔으면. 그래서 언젠가, 온전히 각자의 색깔로 빛나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바라봐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세상에 다시없을 빛깔로 함께 반짝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