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여행을 오고 나서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날씨였다. 분명 내일은 흐리다고 했는데, 눈을 뜰 때쯤이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아침마다 목격했던 것. 이쯤 되니 나는, 이곳에 온 지 겨우 두 주도 되지 않은 여행객 주제에 확신이 생겼다. 제주도의 '흐림'은 진짜 흐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지역의 '구름 많음' 정도일 뿐이라고.
그런 기묘한 날씨 덕분에 오히려, '내일은 비가 온다니까 마음 편하게 그냥 뒹굴거려야지.' 했던 나의 집순이 플랜이 몇 번이고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제주도까지 와서 날씨 좋은 날 숙소에만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완벽주의자의 슬픈 모순이랄까. 쉬고 싶어 온 여행이었지만, 하루도 대충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날씨가 흐리다는 예보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핑곗거리였다.
체육대회 날 비가 온다는 기상청의 웃픈 전설을 알면서도, 매일 잠들기 전 내일은 어디를 갈까- 날씨를 보다가 하루 이틀 뒤에 비 소식, 흐림 예보라도 있으면 면죄부(!)를 받은 것 같아심장이 두근거렸던 나. '내일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다...!' 은근슬쩍 마음이 푸근해졌던 순간들이었다.
4월 중순부터 시작됐던 여행길. 5월 초가 조금 지나고 나서 들른 어느 문방구에서 듣게 된 신기한 이야기. 4월의 제주에는 '고사리 장마'라는 게 있단다. 그때쯤 비가 많이 와야 고사리가 잘 자란다고 해서 고사리 장마라는데, 올해는 조금 특이하게 그 장마가 오지 않은 거 같다는 사장님의 말.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5월 중순 즈음.가족들과 함께였던 여행동안 나는, 일기예보대로 눈물 흘리는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제주도의 '흐림'도, 진짜 '흐림'이었다는 걸. 지난날들 동안 내가 만난 날씨는내게 주어진 선물이었다는 걸 말이다.
4월의 어느 날, 차도 없이 겁도 없이 이 섬에 온 뚜벅이가 만났던 그 이상한 날씨는, 날씨요정님이 거나하게 퍼부어주신 축복이었다.고사리들에겐 참 미안하지만, 처음으로 혼자 낯선 길 위에 섰던 어느 여행자는 그 기묘한 날씨 덕분에 많은 추억을 얻을 수 있어 행복했고, 그렇게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때론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마주하는 동안에는 축복인 줄 몰라 나를 당황스럽게 하던 것들이, 지나고 나니 삶의 어느 순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행운이었던 순간들이.그러나 아마 몇 번이고 다시 마주해도, 나는 또 지나고 난 뒤에야 알게 되리라. 삶의 언젠가 내 곁을 지나간, 행운의 모습으로 찾아온 행복을. 그리고 그 행복에 쏟아부어진, 이름모를 누군가의 찬란한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