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여행은 즐겁습니다. 내가 떠나온 곳이,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모르는 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일 때가 많기 때문에요. 물론 인생은 길고, 때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우연을 운명처럼 만나기도 하니 우리에겐 분명 방황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획되지 않은 것들을 견딜 힘이 부족해서 저는 늘, 되도록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나 봐요.
그런데, 세상엔 ‘네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던 우스갯소리처럼 이 지구를 공유하는 사람 수만큼 무수히 많은 계획이 흩뿌려져 있더라고요. 그건 때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큰 사고를 일으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것을, 저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면서 조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의 계획 혹은 그조차도 예기치 못한 사고에 함께 휘말린 사람이었어요.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표현하지 않는 말들은 마음에 쌓이기만 했으며, 제가 돌보지 않는 자신은 타인에게도 그저 잔디 같았나 봅니다. 그렇게 저는, 타인을 탓하는 대신 저 자신을 목 조르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사람에게서 단 한 가지만 빼앗음으로써 그를 죽은 것만 못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무엇도 아닌 ‘희망’일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저 누군가의 계획과 우연한 사고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이 세상. 그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은, 이렇게 더 살아서 뭐할까 하는 무망감에 저를 빠트려 놓았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그저 사라지고 싶은 자신을 발견했던 그 순간들이 생각날 때마다, 저는 지금도 등골이 서늘합니다. 그 무망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에게는 설명할 방법도 없는, 바닥 없는 수영장에 빠진 것과도 같아서요.
그래서 떠나야 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던 사무실을 떠나야 했고, 너무나 익숙하고 안온해서 오래된 우울이 벽지처럼 달라붙은 집을 떠나야 했고,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망감으로부터도 꼭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99%의 두려움과 1%의 의무감으로 떠난 여행이 바로 제주도 한 달 살기였어요.
별 거 없이 그저 가보고 싶었던 곳들에 닿아보고, 자연 속에 혹은 사람들 틈에 온전히 혼자 있어보는 시간들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좋았습니다. 별 거 아닌 시간들이 저의 강박을 다독여줬고, 바라만 봐도 편안한 자연이 제 불안을 감싸 안아줬으며, 세상에 오롯이 혼자라는 사실이 제 무망감에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에요.
인생을 사랑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사라지고 싶었던 마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언제고 다시 또, 숨 막히는 현실에 무망감이 들이닥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살고 싶었어요.
제주도. 그곳에서 저는 많은 바다를 만났고, 많은 산과 들도 만났습니다. 비 오는 날도 있었고, 햇살이 찬란해 눈이 부신 날들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이 좋은 여행조차도 그만두고 싶어 숨이 막히는 날도 있었고, 그 모든 괴로움을 잊을 만큼 벅찬 날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매 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나 주저 없이 또 떠남을 선택하는 건, 이미 때 묻어버린 일상으로부터 떠남과 함께 그 일상으로 다시 여행 오기 위해서란 걸 떠올려 봅니다.
진부한 결말이지만, 한 달 살기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었던 덕에 지금 일상에서 숨을 쉬는 제게, 제주도는 여행지이면서 제 자신이었고,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준 첫 스승이었습니다. 그녀가 섬이라서, 바다로 둘러싸인 존재라서, 거기에 있어줘서, 나를 받아줘서. 모든 것이 다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매일이 여행 같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일상 속에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제 다음 여행지일 거라 믿으며 오늘도 기약 없는 여행을 또 떠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