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기를.

가을날 부치는 편지

by 양지음

나의 오랜 사랑에게.


무던히 그대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그곳의 생활은 어떤지, 날씨는 견딜 만한지, 이따금 나를... 그대도 추억하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으나 차마 건넬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 마음 아파, 자주 꺼내보지 못하는 것마저 참 미안해진 그대. 오랜... 시간이었지요? 우리가 함께 길을 걸어온 것은. 사회적 약속에 따른 시간으로도 그렇지만, 그보단 그대와 나 사이에 마음으로 흘렀던 시간의 길이가 훨씬 더 긴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말을 잃었던 어제가 아직도 생생한데, 계절은 뭐가 그리 급한지 벌써 여름을 다 달리고서 이제는 가을 앞에 멈춰 서 있네요. 그대와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선선한 초가을의 산책길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은 쓸쓸하고도 부산스럽게 만듭니다.

어떤 모습이었다면 우리의 마지막을 조금은 더 편안하게 꺼내어 볼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이따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대가 조금 더 행복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요. 그러나 나는 압니다. 어떤 마지막이었더라도 나는, 그대가 떠나던 그 겨울바람처럼 그렇게 시린 눈물을 흘렸으리란 걸. 그럼에도, 이런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대가 아니라 남겨진 나를 위해 변명을 하고프기 때문인 걸까요...?

그대의 부재가 무던한 일이 되었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울음이 터져 나오는 나는 올해가 지나가기 전 그대에게 꼭 편지를 쓰겠다는 이상한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부족했음을, 그대에게 내가 못난 이였음을, 우리의 마지막이 그런 모습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음을... 전하는 그런 사죄의 말을 써 내려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그대와 함께여서 내 지난 순간들이 온기를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싶어졌거든요. 사소하고 보잘것 없이 사람들 틈에서 치이기 바빴던 나에게 그대의 사랑은 세상 무엇보다 든든하고 고마운 내 행복이었음을. 세상에 유명한 그 말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음에도 미련하게 그대를 떠나보낸 나의 마지막 인사는 ‘그저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란 걸.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대가, 그래도 늘 기억해줬으면 할 뿐이에요.

어쩌면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 시간의 무게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너무 당연시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어차피 이별은 예정된 수순처럼 우리 앞에 다가올 거란 생각에 그대에게 조금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후회와 자책뿐인 이 마음속에도 이따금 또 꽃이 피고 눈이 내릴 것을 나는 압니다. 그렇게 조금씩 더 따뜻한 추억이 되어갈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대의 마음 또한 그걸 바랐으리란 걸, 사실은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할 길 없는 이 편지의 마지막은 상투적이지만 이렇게 끝마쳐볼까 합니다. 사랑한다고, 참 많이 사랑했다고. 그대 이제는 내 곁에 없어도, 나는 늘 그대와 함께였던 어제를 다시 또 살아가는 오늘일 거라고. 그러니, 지난하리만큼 오랜 시간이 걸려 조금은 서로에게 무뎌진 모습으로라 해도 우리, 부디 이 시간의 끝에서 기쁘게 다시 또 만나자고.


추신)

그대가 좋아하던 산책길에 낙엽이 떨어지는 지금, 그대를 잃은 계절이 돌아오기 시작한 이 지금, 문득 집어삼킨 어제의 이별이 이제사 조금씩 체하고 있는 바보는 당신을 잊지 못했고, 또 당신을... 잊지 않을 작정이라고. 바람결에 꼭 이 모든 이야기가 저 가을 하늘 하염없이 흐르는 구름처럼 당신에게도 흘러가기를.


그대의 오랜 벗이자 세상이었던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