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눈물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다가, ‘쓸데없이’란 말에 눈물이 났다. 언제부터 내 눈물은 쓸데없는 게 되었을까.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 많은 순간, 내가 외면한 내 눈물은 나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고도 ‘쓸데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만히 되돌려 보면,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듯 내 눈물도 쓸데없는 게 아니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내가 울고 싶어진다면 그건 다 쓸 데가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대가 참은 눈물들이 그 푸대접에 언젠가 들고일어나는 것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조금쯤은 푸대접해도 되는 건 나 자신이나 내 눈물이 아니라 타인이나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뚝뚝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속 짐을 대신 그러안고 세상으로 뛰어내려줄 나만의 안전장치를, 스스로 끊어내 버리는 것은 치러야 할 대가가 생각보다 크니까.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을 바꿔야 한다면, 눈물만큼 괜찮은 정화장치가 없다. 눈물로 닦아낸 눈동자에는,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고일 수 있으니까. 우리의 삶이 지저분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 삶을 담아낼 눈 속을 씻어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마지못해 하던 방 청소보다도 더 가끔 하는 마음 청소가, 우리의 일상을 먼지 뽀얀 시궁창으로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단 얘기다.
쓸데없이 마음을 빼앗는 일들이 많아지고, 쓸데없이 지치는 날들을 걸어가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울 때다. 무엇도,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심지어는 우는 모습조차 신경쓰지 않고서. 엉엉거리며 울든, 조용히 한 방울씩 눈물을 떨구든 그 또한 내 몫이고 내 마음이지 뭐. 방청소 하는 모양새가 엉망이라며 뭐라 할 사람 없듯, 우는 모습으로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니까.
고이는 것은 흘려보내 주고, 그렇게 빈 곳엔 또 새로운 것을 ‘괴어’ 보자고 마음에 새겨본다. 사랑하고 어여삐 여긴다는 말의 옛 모양이 ‘괴다’인 것은 어쩌면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