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아프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만, 잘 모르는 이의 죽음 또한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비슷한 존재여서일까. 허무하게 사라진 생명의 숨결을 보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가슴속에 차오른다.
살거나, 죽거나. 생사는 이토록 명확한데,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해석은 모두 같지 않다. 좋은 전쟁이 없듯 나쁜 평화도 없다던, 누군가의 명제 같은 논평이 생각난다. 죽음에도, 나쁜 죽음이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 앞에서 그 죽음의 완전무결함을 따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 놀람을 다시 돌아본다. 굳이 사람이 많을 시기에 그 공간에 간 존재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그러나 몇 시간 뒤, 하루 뒤. 몇 번이고 곱씹어보며 깨닫는다. 나 또한, 어디에서든 또한, 얼마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휩쓸릴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도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발생했다는 것, 그뿐.
그저 그 공간에 그 시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질타받을 이유가 과연있을까. 모두가, 전날밤 지친 일주일을 마무리한 '우리'였을 텐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단지 어느 거리를 이동하려다사망할 수도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어느 정도 예상하고 막을 수 있는 문제였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불안을 자력으로 대비해야 하는가.
인간은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건, 대개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존재라는 것. 그건 어쩌면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이타적이게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이기적이게 되는. 그렇다면 더더욱, 이렇듯 나와 먼 이야기 같은 상황일수록, 그래서 더더욱 비난을 쏟기 쉬운 일일수록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남의 안위를 자신의 것처럼 고민해야 결국 나의 안위도 보장받을 수 있음을.
타인을 덮친 이유 없는 생의 절망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게 나의 일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지금 내가 소리 높여 관철시킨 주장들은 언젠가 나에게도 되돌아와 적용될 것이다. 아이를 보호할 의무를 먼저 저버린 어른이, 그러고도 내 옆의 아이가 겪는 곤란을 못 본 체한 바로 그 어른이, 언젠가 나에게 닥친 곤란에 관심을 가져줄 거라 생각하는 건 오만한 착각에 지나지 않을 테니.
아주 종종, 의무 없는 권한만을 행사하고픈 어른들의 '놀이'에 희생되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또다시 무력하게 희생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국화꽃 대신 이 글을 바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말라. 종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울린다. 떠난 이만큼의 세상을 바꿀 기회를, 그만큼의 놀라운 우주를, 다시없을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운다. 위로받아야 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