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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령 Jun 15. 2020

뉴질랜드로 오기까지

뉴질랜드에 온 지 3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그곳, 사람보다 양이 많다는 호주 옆에 있는 작은 섬나라. 


호주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개월간의 첫 해외생활과 6주 동안 홀로 떠났던 유럽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가치관에 큰 혼란이 생겼다.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또 1년 휴학을 하면서 돌아오면 잔말 말고 취업준비를 하겠노라 부모님께 약속했는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떠나기 전 내가 그렸던 미래는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사실 떠나기 전에도 대기업에 취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설레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그게 좋다고 하니까. 남들이 다 하는 코스니까. 돈을 많이 준다니까.  


그래도 돌아와서 1년 동안 나름의 노력은 했다. 1, 2학년 때 망쳐놓은 학점은 마지막 남은 학기에 노력한다고 복구가 되진 않았지만 남들이 준비하는 토익, 자격증을 급급히 따기도 하고 무려 5만 원이나 내고 취업스터디에 꼬박꼬박 참여하기도 했다. 


그 당시 공기업에서 주 3회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나의 직업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들어가기 힘들다던 공기업에 겨우 들어가도 저렇게 상사 눈치에 고객 눈치에 짓눌려 사는구나.. 크게 깨달았다. 더불어 당시 취업했던 동기, 선후배들 모두 나 죽네, 소리는 해도 회사 다니며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4학년 2학기를 마치고 그다음 연도 상반기 공채에 지원했다. 참 많은 회사에 지원을 했었다. 열심히 적은 '자소설'을 복사해 회사 이름만 바꿔 붙여 넣기를 반복했고 운 좋게 대기업 한 군데와 공기업 한 군데에서 인적성까지 쳤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수차례 불합격 소식을 받다 합격 소식을 받았을 땐 얼마나 기뻤던지.


대기업은 무려 면접까지 올라갔었다. 아르바이트를 3개나 하며 겨우 생활을 유지하던 때라 면접 한 곳을 위해 정장을 사고 싶지는 않았기에 건대에 있는 정장을 대여해주는 '열린 옷장'을 이용했다. 직원분이 친절하게 사이즈도 봐주고 스타일도 추천해주었기에 큰 무리 없이 정장을 대여해왔다. 그래도 구두는 직접 사고 싶어서 저렴한 스파 브랜드에서 정장용 구두를 고르고 1+1으로 예쁜 하이힐도 함께 사 왔다. 굳이 덧붙이자면, 정장용 구두는 면접 이후 단 한 번도 신은 적이 없다. 슬프게도.


동국대 주변에 있던 큰 호텔에서 꽤 오랜 시간 진행된 면접을 하면서 세상엔 참 능력 많고 말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3만 원 정도의 면접비를 받고 길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절뚝거리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5월의 한낮, 쨍쨍한 햇살 아래 검은색 정장은 숨 막히게 더웠고 퉁퉁 부은 발에 뒤꿈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결국 지하철 승강장에서 구두를 벗고 맨발로 지하철을 기다렸다. 가끔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남의눈을 신경 쓰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된 거 같다. 아마 내 길은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있는 게 아닐까? 호주 생활이 재밌었으니 비슷한 국가로 한번 더 나가볼까? 그래, 한 번만 더 나가보자.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 호주를 제외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갈 수 있던 영어권 국가는 뉴질랜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였다. 면접 일주일 후 때마침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일이었다. 

26살에 뚜렷한 목표 없이 도망치듯 워홀을 시작하는 것에도 확신이 없었고, 마침 공기업에 아르바이트를 가는 날이어서 조금 일찍 출근해서 회사 컴퓨터로 신청했다.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지 하얀 대기 창을 30분 넘게 보며 '역시 피시방을 갔어야 했나..' 생각하던 찰나 덜컥 비자를 받았다. 그렇게 도망치듯 숨고 싶었던 내게 뉴질랜드는 1년 동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은 이후 아빠와의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니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거야.'라는 엄마의 지원 덕분에 다시 한번 해외 생활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이미 한 번 호주로 경험을 해봤었기에 뉴질랜드로 가는 준비는 크게 힘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100만원의 초기 자금과 미리 결제한 1주일 동안의 숙박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인 '돈'이었던 호주와 달리 이번엔 '여행과 영어실력 향상'에 초점을 두자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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