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 상처쯤이야
남자 친구가 전에 키우던 새끼 고양이는 옆집 개에 물려 생명을 다하였다. 그 상처가 너무 커서 루나를 데려오기까지 마음먹기 오래 걸렸다.
그래서 루나는 나에게 주는 선물로, 본인은 내가 잘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것까지만 하겠다고 선을 딱 그었다.
처음엔 "It's your cat."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남자 친구에게 조금 섭섭했지만, 그 상처도 이해하기에 "그래, 루나는 내 고양이야. 내 새끼지."라고 받아들였다.
사실 남자 친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나를 처음 데려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루나를 성심성의껏 함께 보살피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새끼 너무 예쁘지 않아?"라는 내 질문에 "우리 새끼지."라며 슬슬 정정하기 시작하는 남자 친구와 나의 애정 아래 루나는 오늘도 건강히, 행복하게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루나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루나는 낯가림이 심하다. 루나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살던 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고 주변 이웃과 동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손에 꼽을 정도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에 루나는 태어나서 우리를 제외한 다른 인간과 접촉한 적이 거의 없고, 집 앞에 있던 언덕에 살던 5마리의 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동물들과의 접촉도 많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름 큰 도시의 주거지역으로 이사를 오고 처음 몇 개월간 루나에게는 충격과 공포의 시간이었으리라 예상된다. 지금 이사한 동네에는 남자 친구의 가족들이 많이 살아서 집에 손님이 올 때도 잦고, 집 주위 산책로가 있어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사 오고 한 2-3주간은 루나가 더운 한 여름임에도 낮에 이불 아래 숨어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가지고 커튼을 다 치고 나면 그때서야 슬그머니 침실에서 나와 새로운 집에 적응했던 게 기억난다. 지금도 루나는 겁에 질릴 때면 침실로 직행한다. 주로 침대 아래나 이불 밑에 들어가 숨어있는다.
루나는 나와 남자 친구를 제외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 집에 손님이 있다는 걸 알면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집 근처 나무 위에 숨이었다가 한참 뒤에 돌아오기도 하고, 캣 도어가 잠겼을 시간에는 침실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손님이 가고 나면 내 다리를 한 없이 쓰담 쓰담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루나의 극단적인 낯가림 덕에 우리가 말하는 애교쟁이 루나는 비디오로 찍지 않는 이상 누구도 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루나가 애정을 표현할 때면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질 듯이 기쁘다.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기에, 나와 남자 친구에게만 표현하는 루나의 애정이기에.
사실 루나는 애교쟁이는 아니다. 사람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듯이 고양이도 여러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루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용사를 꼽아보자면 'Feisty'이다.
Feisty : 혈기 왕성한, 거침없는 / 네이버 어학사전
우리가 잘못 교육을 시킨 것인지 루나는 우리에게 손톱, 발톱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직 애기다 보니 인내심도 굉장히 짧아서 우리가 루나를 안거나 장난을 칠 때면 지체하지 않고 사정없이 우리 팔을 긁고는 도망간다.
나에게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키가 큰 남자 친구는 퀸 베드에 누워도 발이 튀어나온다. 근데 그게 그렇게 루나의 눈에 매력적인 장난감인지.. 새벽이나 아침에 사정없이 남자 친구의 발을 물거나 긁어서 한동안 남자 친구가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루나가 우리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내가 가장 귀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인형을 물고 오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위의 저 인형이 4개쯤 있다. 그중 루나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은 백호로 추정되는 Zac(잭)이었다. 루나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선물이었다.
루나는 오랫동안 남자 친구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나면 거실에 있던 잭을 물고 침실로 와서 남자 친구의 베개 위에 올려두었다. 또, 내가 샤워를 하러 가면 방에 있던 잭을 물고 화장실로 쫓아와서 샤워실 바로 앞에 떨어뜨리고는 그 옆에 발라당 누워버린다.
분명 출근 전에 침대 위에 있던 잭을 퇴근할 때는 현관문 바로 앞에서 발견하곤 했는데, 우리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거기에 두었다고 나름 짐작하곤 했다.
이사 오면서 잭을 잃어버려서 루나보다 내가 더 속상했었다. 하얗던 잭이 누레질 정도로 루나가 항상 물고 껴안고 자던 최애 인형이었는데, 우리의 부주의로 잃어버렸다는 것에 꽤나 오래 죄책감을 느꼈다.
사냥을 한 뒤로는 확실히 밖에서 직접 잡아오는 도마뱀이나 새 등으로 관심을 옮겨간 듯했는데, 최근에는 다시 인형들하고도 자주 노는 듯하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바다표범 인형이 내 의자 위에 떡하니 앉아 있다거나 물개 인형이 내 베개 위에 있는 걸 자주 발견한다. 살아 움직이는 루나의 선물들 보다는 내가 안심하고 만질 수 있는 인형들을 백배 천배 환영한다.
루나는 messy-eater다. 지저분하게 먹는다는 이야기다. 뉴질랜드의 고양이 호텔 격인 Cattery(캣터리)를 오래 운영한 지인이 우리가 여행 간 사이 루나를 봐준 적이 있는데, 그분이 인정할 정도로 고양이 중에서도 지저분하게 먹는 친구다.
예전엔 깊이가 있는 플라스틱 그릇을 사용했었는데, 밥이든 물이든 수염이 닿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여 넙적한 도기 그릇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넙적해서 루나가 밀면 미는 대로 사료가 밖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고양이답게 중간이 비면 다 먹었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시 밥그릇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그러다 내가 본인 그릇을 만지는 걸 보면 밥이 새로 채워진 줄 알고 멀리서도 쏜살같이 달려온다.
내가 하는 건 도넛처럼 가운데만 비어있는 그릇에 흩어진 사료를 다시 모아주는 것뿐인데 이걸 해줄 때와 아닐 때 루나의 음식 먹는 양이 확연히 달라지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그릇이 텅텅 비어있는 걸 보면, 본인이 사실할 줄 아는데 귀찮아서 날 부려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루나는 비가 오는 날 심술이 많아진다. 나갔다가도 금방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집에서 이상행동을 보인다. 공격성도 심해지고 창밖을 보면서 우울해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창문 옆에 앉아 나보고 비를 그치라는 듯이 '냐옹'하며 울거나 캣 도어 바로 앞 지붕 밑에 앉아 끊임없이 밖을 바라보고 있는다.
본인의 영역을 확인하고 오는 건지 볼일을 보고 오는 건지 놀다 오는 건지, 비가 많이 오는 날 나갔다 들어올 때면 홀딱 젖어서 돌아온다. 처음 수건으로 말려주려고 할 때는 수건의 감촉이 낯설었는지 기겁을 하면서 도망가더니 이제는 비 맞고 왔을 때 내가 늦장 부리면 수건 옆에 앉아서 빨리 말려달라는 듯 연신 소리를 낸다.
고양이가 소리를 내는 건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확실히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루나가 만드는 소리가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잘 소통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