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자전거 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가장 큰 업힐 구간은 아이유 3단 고개였다. 국토종주를 훈련하면서 이화령은 5킬로 내내 업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누구는 국토종주길에 엄청 힘든 오르막 구간이 나오길래 드디어 이화령을 넘어가는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화령 전에 나오는 소조령인 것을 알고 좌절했다는 무시무시한 일화도 들었다.
업힐에 대한 감이 없는 나는 '아이유 3단 고개를 넘었으니 이제 준비가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내가 올라가는 코스가 이화령과는 상관이 없어서 큰 짐은 덜은 셈이었다. 소조령 정도는 경험해보겠구나 생각했는데, 모래재라는 고개가 내가 가는 코스에 존재하고 있는 줄 까맣게 몰랐다.
처음 자전거 맵의 고도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인증센터 단위로 끊어서 목표지점을 정하고 가다 보니 언제 큰 고개가 나올지 몰랐다. 초반에는 완만한 오르막 구간이 계속되었다. 역풍이 불고 있는 한강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꽉 막힌 페달링을 계속했다.
반대편에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라이더들이 손을 흔들면 환하게 인사를 했다. 나중에야 그 사람들의 얼굴이 왜 그렇게 환했는지 알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난 앞으로 벌어질 앞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계속된 완만한 오르막에 이게 언제 끝나는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인 도로 구간이 나오더니 강원도 갈 때 만나본 적이 있는 굽이 굽이 빙빙 돌면서 올라가는 오르막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 굽이 굽이 이어져 언제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지점이 끝인 줄 알고 참고 견디고 올라서면 반대쪽으로 휘어 돌아가는 오르막이 나왔다.
'헉, 여기가 끝인 줄 알고 있는 힘을 다해 올라왔는데 다시 시작이라고?'
이쯤 되면 상당히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게 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고 있는 힘을 쥐어짜며 올라와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는데 그 지점에서 뒤로 돌아가는 오르막이 다시 보이면 다리가 풀리고 주저앉고 싶어 진다.
'이젠 더 이상 못해,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면 안 되나'
누구도 나에게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해놓지 않았다. 힘들면 내릴 수도 있고 조금 쉬었다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꾹 참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이번엔 머리를 들지 않고 땅만 보았다. 절대 꼭대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순간 머리를 들어 앞을 볼 때면 손과 발에 힘이 풀렸다.
'저 높은 곳까지 언제가, 저길 지나서도 끝이 아니면 어떡해'
그만큼 사람의 기대는 희망을 주기도, 절망을 주기도 한다.
한참을 땅바닥만 보며 페달링 하다 보니 슬슬 다리에 들어가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와 거의 다 왔나 보다, 다 왔나 보다"
갈지자로 이리저리 흔들흔들 거리며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여기까지 올라왔던 고통의 기억은 정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참아냈다는 기쁨, 긴 터널에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작된 내리막길, 끝도 없이 계속되는 내리막길,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속도감에 황홀감이 몰려왔다.
도로여서 차도 다니는 길이었지만 차는 거의 없었다. 이 굽이 굽이 돌아가는 내리막길을 자전거 하나에 의지해 혼자 소리를 지르며 내려갔다.
그렇게 모래재 고개를 넘고 나니 얼마 안가 다시 소조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래재도 그 고통을 겨우 참고 넘었는데, 소조령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고개를 연달아 두 번 넘을 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모재래를 넘었다는 안도감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온몸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기어비를 가장 낮게 낮추니 6km 정도가 속도계에 찍혔다. 빨리 걸을 때 나오는 속도와 비슷했다.
어느 정도 지나니 이 속도와 힘에 적응이 되었는지, 참을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상태로 한참을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단지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비 오듯이 땀이 쏟아졌다. 머릿속은 온통 페달링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변의 풍경도 굽이 굽이 고개의 아름다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한 바퀴 한 바퀴, 호흡과 정신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고개를 처박고 위를 쳐다보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니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었다. 1초, 1초가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모래재를 넘으며 힘을 다 쏟은 줄 알았는데, 소조령을 넘어갈 체력이 남아 있었다. 근육들이 촘촘해지고 잠들었던 근육이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 아침부터 아팠던 엉덩이 통증은 업힐 구간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놀라운 신경시스템이 위기 맞닥뜨리자 다른 통증을 차단하는 것일까? 고통을 고통으로 이겨낸다라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문득 자전거를 타면서 마주하는 오르막과 내리막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주어진다. 고통의 최고조를 지나면 즉시 내리막의 보상이 주어진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면 어떤 오르막도 참고 견딜 수 있을 텐데, 오늘 본 드라마에서 '죽도로 뛰어왔는데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다'는 대사를 보고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자전거가 주는 힘듬은 인생보다는 쉽다.
내 자전거 여행의 끝에는 집이 있고 휴식이 있고 편안함이 있다. 지금 이 두 개의 고개가 없었다면 내리막길에 들어서서 보이는 풍경들, 상쾌한 공기, 짜릿한 속도감, 자신감,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을까?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겪었던 고개들의 내리막길들이 짧은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복잡한 감정과 함께 마치 수능 시험을 끝내고 학교 문을 나서는 고등학교 3학년처럼 홀가분함이 밀려왔다.
두 개의 큰 고개를 넘고도 어제처럼 140km를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는데, 오후 5시부터 바람이 나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싶었고, 자전거에 내려서 끌고 가고 싶었고, 왜 내가 긴 연휴에 사서 고생을 하나 싶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2일 차 마지막 30km를 앞두고 바람이 나를 밀어주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나무들, 꽃들이 나에게 환영의 손길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힘든 고개를 넘은 나를 위로하듯 해는 저물고 남한강이 곧 보이는 여주에 들어섰다.
마지막 숙소에 다다르자 오늘도 이렇게 씽씽 달릴 수 있는 내 몸이 감사하고 대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