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낮잠이 부른 참사

온실 속 화초를 땡볕에 꺼내 놓으면

by 케잌

1. 시뻘겋게 타버렸다.

2. 해변가에서 30분 정도 깜박 잠이 들었는데, 팔과 다리에 화상을 입어 버렸다.

3. 자고 일어나 바닷물에 들어갔는데 다리에 물이 닿는 순간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아팠다.

4. 시뻘겋다고 밖에는 설명할 단어가 없는 색으로 변해버린 피부는 하루가 지나도 조금도 진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5. 바람만 스쳐도 으악 소리를 내지를 만큼 고통스럽다.

6. 도시형 실내인간으로 살아온 나는 자외선이 무서워봤자라고 생각했다.

7. 햇빛에 노출되는 건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걸어가는 찰나가 전부인데 매일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건 좀 과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8. 드라마틱한 구석이 좀 있는 나는 햇빛에 부풀어 오른 다리와 충혈된 내 눈을 보며 기후변화로 지구 상의 모든 게 다 타버리는 재난영화를 떠올렸고, 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를 상기했다.

9. 원래도 신체능력이 미흡한 인간인데 도시에서 온갖 편의에 둘러싸여 살면서 그나마도 있는 능력이 점점 퇴화되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10. 30분 낮잠이 얼마나 오랜 기간의 고통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한동안 태양신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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