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1. 올해 초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 장례를 모두 치르고 난 후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고모할머니가 나의 엄마에게 말했다.
3. ‘그래도 맏며느리인 네가 아들을 못 낳은 건 불효한 거다. 알지?’
4. 당신의 아들 딸보다 더 살뜰하게 할아버지를 보살핀 건 피 한 방울 안 섞인 맏며느리였다.
5. 그런데도 결혼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끝도 없는 돌봄의 시간을 껑충 건너뛰고 단 한 가지 사건이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거론되었다.
6. 40년 전에 아들을 낳지 못한 것.
7. 2022년의 어느 날, 일흔이 다 된 엄마가 듣기에는 너무 부당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
9. 내가 아무리 항의를 한다한들 그 말은 고모할머니의 세계에 가닿지 않을 것만 같다.
10. 고모할머니의 말도 우리 엄마의 세계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