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실망
‘실망했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누구라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특히 나에게 실망한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더 속상할 테죠.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이 초라해 보일 거예요. 그게 심해지면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책마저 들 거구요.
저는 전형적인 K-장녀답게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어요.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누구라도 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어요. 상대방의 기대가 부당하고 부담스럽더라도 고집스럽게 최선을 다했고, 힘에 부칠 때에도 저를 들들 볶으며 괴롭힐지언정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 수많은 기대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로 돌아오는 실망에 아주 고통스러워했죠.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또 어떻고요. 어떤 문제에 대처하는 실제 자신의 모습이 상상과는 달리 너무 하찮아서 당황스러웠던 적 없나요? 아니, 이보다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저에게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실망한 사람은 아마도 저 자신일 거예요.
하지만 마흔이 되고 보니,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감정이 ‘실망'인 것 같더라고요. 아니, 오히려 아주 대차게 상대를 실망시키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경험이 건강한 어른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 같아요.
상대에게 실망하고, 상대를 실망시키고, 또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과정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든, 얼마나 잘난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어릴 땐 나에게 드리워진 기대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따져볼 겨를이 없었어요. 언제나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기에 바빴고, 기대의 정당성을 운운하기에는 사회 안에서 저의 자격이 부족한 것 같았거든요. 일단 어떻게든 노력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죠. 하지만 얼마만큼 기대해야 과연 적당한 걸까요? 그리고,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실망시키는 것보다 언제나 더 좋은 건가요?
실망과 실패는 다른 거예요.
누군가 저에게 실망을 했다면 반은 제 책임일지 몰라도, 나머지 반은 잘못된 기대 탓이에요. 어떠한 기대는 오히려 충족시키지 않음으로써 그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 실망과 마주했을 때 무작정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애초에 그 기대가 내가 바라는 모습이 맞나를 다시 생각해 보세요.
실망은 누구나 하는 거예요. 실망시키는 일도 말할 것 없고요. 실망이라는 감정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요.
수도 없는 실망으로 너덜너덜해진 지금의 제 모습이 저는 더 좋습니다. 많은 실망을 거쳐, 지금의 저와 대충 합의점을 찾았는데요, 앞으로도 끊임없이 실망할 여지가 있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건강하게 나이 들고 있다는 증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