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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Feb 02. 2024

뱃속에 시계를 삼킨 기분

째깍째깍, 어디서 시간 가는 소리 안 들려요?

피터팬에는 시계를 삼킨 악어가 등장합니다(물론, 악어가 삼킨 것이 시계만은 아니죠. 후크선장의 한쪽 팔도 삼켰…). 언젠가부터 저는 그 똑딱 악어가 되어버린 기분이에요. 아니면 똑딱 악어에 쫓기는 후크선장이던가요.


‘와, 시간 진짜 빠르다'는 말은 한평생 숨 쉬듯이 내뱉은 말이지만, 마흔이 되고 나서는 째깍째깍 거리는 소리가 실제로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치 뱃속에 시계를 삼킨 것처럼 말이에요.


뭘 해도, 안 해도 시간은 잘도 갑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허둥지둥 늘 마음이 급합니다. 해야 할 일은 왜 이렇게 많고, 한 것은 없는데 왜 또 벌써 2월인가요? 


얼마 전 좋아하는 언니와 국악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저 혼자였다면 생각도 못했을 테지만, 언제나 재미난 것을 궁리하는 언니 덕에 저로서는 꽤 신선한 경험을 했어요. 국악연주와 함께 무용단의 춤공연도 볼 수 있었는데요,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도무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속도로 춤을 추고 있었거든요!!! 동작과 동작사이가 하도 느려서 0.5배속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속도로 가다간 무대 중앙까지 나왔다가 들어가는 걸로 공연이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어요(요즘 웬만한 콘텐츠는 1.25배속으로 돌리는 게 저뿐은 아니죠?).


공연을 보고 농담 삼아 언니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어요. 아니, 옛날 사람들은 평균수명도 우리보다 짧았으면서 빨리빨리 놀 거 놀고, 할 거 하고 해야지 어느 세월에 다 하려고 저러는 건지 답답하다고요. 옛 선조들이 즐기던 풍류의 핵심은 ‘이 세상 시간이 죄다 내 거다’는 마음가짐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저처럼 늘 마음이 급한 분들께 0.5배속의 국악공연을 적극 추천드립니다.)


또 얼마 전에는 여럿이 여행을 다녀왔어요. 다른 이들과 일정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늘 빨리빨리 준비를 마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그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속도가 좀 느렸어요. 모든 사람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자기 속도대로 밥을 먹고, 뭐든 조금씩 늦었습니다. 그런데 얄밉기보다는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속도에 맞춰 다 가질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쏟는 모습이 저에게는 새로웠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어요. 사실 저희 여행 일정이 전혀 빡빡하지 않았거든요. 그저 천천히 즐기면 되는 것이었는데도 오히려 제가 괜히 주변 신경을 쓰느라 종종거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속도와 관련된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더 공유할까 해요. 


혹시 러닝머신 사용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언제나 3이나 4 정도의 느린 속도로 걷기 시작해서 조금씩 속도를 높여갑니다. 빨리 걷다가 종아리가 땅길 정도가 되면 살살 뛰기 시작해요. 그렇게 속도를 높이다 보면 어느새 처음엔 엄두도 못 냈던 속도로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꽤 뿌듯하죠. 


한 번은 그렇게 달리던 와중에 운동화 끈이 풀어졌어요. 아직 목표한 운동량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끈만 묶고 얼른 다시 뛸 요량으로 러닝머신을 멈추지 않고 양 쪽으로 다리를 벌려 머신 위에 잠깐 올라섰어요. 끈을 다 묶고 다시 밴드 위로 내려가 달려야 하는데,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다시 내려서질 못하겠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제가 뛰던 속도인데도요. 


쉬지 않고 달려오던 일을 잠깐 멈추고 제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제가 느낀 기분이 바로 이랬습니다. 방금까지 제가 달려온 길인데, 도무지 다시 그 틈에 들어가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달릴 때에는 그 속도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밀려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힘닿는 데까지 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권도 없으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잠깐 옆으로 비켜섰을 때 비로소 그 속도를 실감하게 됩니다. 


늘 시간이 아깝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시간을 누리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는 조금 천천히,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 세상 시간이 다 내 것인 것마냥, 눈앞에 놓인 즐거움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중간중간 이대로 계속 가도 괜찮은지 체크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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