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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Feb 08. 2024

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쪽 팔린 걸로 죽진 않으니까

‘쪽 팔려'


요즘도 이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땐 쪽 팔린다는 감정의 힘이 대단했습니다. 그 어떤 말과 행동도 쉽사리 쪽팔림의 터널을 뚫고 지나가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쪽 팔리는 것'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어떤 일에 마음을 쏟거나 지나치게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쪽팔리거나 ‘쿨하지 않은'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쪽 팔리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는(혹은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척하는) 이상한 시절이 있었어요. 


내 마음이 어떤지를 아는 것보다 또래 집단에 어떻게 보일지가 더 중요했고, 내가 속하고 싶은 집단이 하지 않을 법한 일은 저 역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말이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남들의 욕망을 무작정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것을 잘 모르거나 못하는 모습을 들키는 것도 쪽 팔린 일이었기에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은 아예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실수를 곧 나 자신의 실패인 것처럼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춘기 한 때의 마음인 것 같지만, 사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쪽 팔림'이라는 감정이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쳐왔어요. 더 이상 ‘쪽 팔린다'는 표현을 쓰진 않지만요. 


사실 저는 어이없는 실수와 삽질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출근길에 원피스 옆구리에서부터 겨드랑이까지 지퍼가 열려 있는 줄도 모르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어쩐지 시원하더라고요?). 버스 뒷부분에 서 있다가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운전석까지 굴러간 적도 있고요(치마를 입고 있었고요). 술 마시고 한 실수를 세자면 끝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며칠이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 잊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어떤 종류의 쪽 팔림은 몇 날 며칠을 이불킥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조금 다른 감정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부끄러움은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창피함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여 부끄럽다'라는 뜻입니다. 쪽팔리다는 ‘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라는 뜻이고요.


부끄럽다는 것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라면 쪽 팔리거나 창피하다는 것은 ‘체면이 깎여’ 부끄러워진 것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인 것이죠.


창피하거나 쪽 팔린다는 감정에는 내가 바라는 완벽한 이미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되어 있어요.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실제 기대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고 싶은 ‘나의 이상적인 모습'이 쪽 팔림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모습이 드러났을 때, 정작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도 혼자 ‘모양 빠지고' ‘쪽 팔리고' ‘체면 구겼다’는 생각에 끝도 없이 괴로워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저에게서 앗아간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저 눈 딱 감고 해보았으면 좋았을 수많은 일들을 '쪽 팔리다'는 이유로 흘려보낸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내 감정을 따라갈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즘 어지간해서는 쪽 팔림을 못 느끼게끔 안면 근육을 두껍게 만드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중교통을 타다가 앞 구르기를 하게 된다면 상당히 부끄럽겠지만, 창피한 일의 범주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나의 구림을 인정하거나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나를 완벽하지 않은 존재로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예전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못하는 일이 수 천 수 만 가지이지만, 제가 잘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는 단단한 믿음이 생겨서이기도 하고요. 뭔가를 못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40년간 학습된 창피함이 단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반드시 창피한 단계를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피한 감정을 견딜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일도, 저에게는 창피함을 무릅써야 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쓴 글을 처음 지인들에게 보여주기까지 일 년이 걸렸어요(저는 작년부터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싶었습니다?). 이 결심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시작을 하는 것'까지가 목표였으니 용기를 낸 제 자신을 칭찬해 주려고요.    


창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거기에 짓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눈을 질끈 감습니다.

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같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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