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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낭만 Jul 10. 2023

반려의 세계



얼마 전, 예전에 구독했던 뉴스레터를 다시 읽었어요. 주제는 ‘반려’였습니다. 최근에는 반려견, 반려묘, 반려 앵무새, 반려식물 등 여러 존재가 있더군요. 인간의 주위에는 함께 살아갈 동반자가 다수라는 점을 한 번 더 절감하게 되었지요. 평생 외로움과 지난한 사투를 벌이면서, 암흑에 지지 않기 위해 ’반려‘라는 개념은 요즘 사람들의 일상 깊은 속에 침투했다는 건 만연해졌습니다. 반대로, 제 일상은 반려와는 조금은 거리가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피어올랐어요.


대개 반려는 살아 있는 생명을 전제로 합니다. 한때 어린 내 곁에 머물다 간 반려견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친구는 맞으나, 내가 그 친구들을 돌보았다는 개념과는 멀었습니다. 같이 놀거나 밥을 준 적은 있으나 일일이 케어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 친구들을 조금 나중에 만났다면, 잘 돌봐줄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의문도 애매합니다. 저는 제 자신도 잘 보살피지 못하는 성인이거든요.


대학원 시절에 여러 이론을 배웠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저는 ‘모성’과 ‘돌봄‘에 지나친 관심을 보였지요. ’나‘를 먹이고 키운 여자 어른들에 대한 역사가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들고, 그들의 ’돌봄‘이 혈관까지 퍼져서 다른 생명에게까지 이행된다는 점은 제 자신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제가 기존에 가지던 가치관이 이 이론들과 잘 어우러지기도 했고요.


다시 뉴스레터로 돌아가자면, 에디터의 말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경에게도 ‘반려 안경’이라는 명칭을 붙이더라고요. 음, 낯설기는 했지만 제 일상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엄청 낯선 개념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거의 20년을 함께 한 애착인형이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털이 포슬포슬하고 까만 콩이 콕콕 박힌 강아지 인형을 참 좋아했습니다. 생일 때마다 갈아치우다가 10살 무렵이었나. 그때 만난 인형과 지금까지 동거 중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인형 역시 털 색만 다른 쌍둥이 형제가 있더라고요. 저는 흰 털의 강아지를, 언니는 누런 털의 강아지를 한 마리씩 껴안으며 오랜 세월을 함께 지냈습니다. 저를 긴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연인들은 이 친구들의 존재를 매우, 그것도 아주 잘 체감하고 있답니다.


저는 이 애착인형에게 여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와 언니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이를 저지하는 것도 인형 친구들의 몫이 되었을 정도지요. 그래서 부모님께서도 어지간히 크면 인형에게 애정이 식을 줄 알았지만, 아직까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친구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제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제 팔에는 이 친구의 형상이 그려진 타투까지 새겨져 있으니, 우리는 아마 죽기 전까지 함께 할 겁니다. 써놓고 보니 조금 무섭네요.


90년대생들 중에 애착인형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맞벌이하는 부모, 텅 빈 집, 사무치는 외로움 등 어린아이들의 공허함이 부피를 늘리기 좋은 환경이지요. 이때 부모들이 귀여운 인형을 안겨주고 떠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인형을 무생물이라 여기는 것이 아닌, ‘동반자’, ‘친구’ 더 나아가 ‘형제’로 생각하며 모든 사랑을 쏟게 됩니다. 저도 이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엄마가 성심성의껏 저와 언니를 챙기고 보살피고 놀아주고 엄청난 사랑을 선사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인형 친구를 쭉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요.


애착 인형 친구의 외형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볼까요? 크기는 꽤나 큽니다. 머리와 배, 엉덩이는 동그랗고 통통합니다. 까만 눈, 까만 코, 앙다문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입, 지워질 때마다 칠해주는 발그레한 볼, 축 처졌지만 제가 억지로 말아 올린 귀, 몸집에 비해 작은 꼬리, 발바닥에 새겨진 그믐달까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거의 이 친구에게 먼저 달려가는 편입니다. 출근할 때도 집에 두고 오기 미안하다는 마음도 들고요. 언제나 한 자리에서 저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 맹목적인 그 마음이 이 친구를 곁에 두고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다 큰 성인이 낡은 인형 하나로 웃고 울고 감싸도는 모습이 꽤나 유치하고 덜 떨어져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계시죠. 대놓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남일이니 신경 끄고 살라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어떤 존재를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품고 있다는 건 절대로 빈약한 마음이 아닙니다. 키우던 반려동물을 버리거나 물건을 쉽게 갈아치우는 것이 퍼진 세상에서, 무한한 애정을 준다는 건 매우 중요해집니다. 참고로, 저는 키우지도 못할 동물을 유기하는 사람을 악마 취급합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존재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정의는 무궁무진합니다. 내 마음대로 정의하면 그만이지요. 액체 같은 사랑은 담는 용기에 따라 모양이 가지각색입니다. 본질은 비슷하지요. 그러니 ‘어떤 존재를 사랑하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사랑할 것인가‘가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깊이도 상대적인 것이라 확답할 수는 없지만요.


야박하고 피폐한 시대에서 일말의 순수함을 간직하도록 이끌어준 존재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채로운 색깔의 ‘반려’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여러분의 반려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처럼 인형일 수도, 뉴스레터의 에디터처럼 안경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이불이나 책, 전자 제품과 반려생활을 만들어 나가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 어떤 것도 괜찮습니다. 꾸준한 사랑을 간직하는 행위만큼이나 가치 있는 건 없습니다. 쉽게 할 수 있는 행동도 아니고요. 저는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밖에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입니다. 저는 쉬는 날이면 애착 인형을 꼭 안고 침대에 누워서 낮잠 자는 일을 즐깁니다. 그 시간에는 오롯이 저와 그 친구만 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거든요. 여전히 그 친구의 머리에 코를 대고,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깊은 잠에 빠지는 게 좋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늘은 저의 휴무입니다. 여름 감기에 걸린 터라, 병원에 들렀다가 복싱을 다녀와서 씻고 우리만의 시간을 또 가지려고 합니다. 익숙한 냄새와 품이지만, 언제나 이를 느끼면 온몸이 녹아내리곤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오늘 하루 마무리를 좋아하는 존재와 함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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