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지금의 내 나이. 이때쯤이면 1인분의 몫을 톡톡히 하는 '진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으나 여전히 내 인생에서 정리된 건 하나도 없는 현 지점, 스물다섯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두발을 그네처럼 휘적이던 중학생은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그 숫자는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열다섯이 더욱 영원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모든 기억은 미화된다. 어쩌면 부생약몽(浮生若夢)에서 벗어나고자 갸륵한 생존 본능으로 대뇌의 시각 피질과 청각 피질은 그동안 지나쳐 온 모든 시간을 '꽤 봐줄 만했다.' '돌이켜보면 재밌었다.'라며 미화하여 저장시키고, 결국 우리에게 '그때가 좋았지.'라는 단골 대사를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일까. 인생은 덧없다. 때로는 억겁의 시간이 나를 짓누른다. 각자의 몫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멀게만 느껴진다. 당신은 무슨 원동으로 어디를 향해가고 있나요. 붙잡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Y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이제는 습관처럼 자리를 잡아버려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철학적인 질문을 뱉곤 했다.
'Y. 삶은 벌일까?'
스물다섯이 할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응. 그럴 거야 아무래도.'
'그럼 이 세상 모두에게 벌이 내려진 거네.'
'글쎄. 적어도 난 벌을 받는 게 확실해.'
도무지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거든. 빨리 퇴근하고 싶다. 늘 그랬듯 생의 본질에서 시작된 대화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지점이 퍽 우스웠다. 고개를 들어 전철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푸르고 싱그러웠다. 부서지는 햇빛에 제 몸을 비벼 반짝이기까지 했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무로 태어나는 것 또한 벌이 될까. 그럼 아름다운 건 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언제부터 웅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단단한 견지.
'삶과 태어남은 벌이다.' 자연스레 윤회를 떠올린다. 여섯 가지의 세상 육도(六道). 나의 현세는 인도(人道)에 있다. 그렇다면 내세는 어디가 될까. 이 지겨운 윤회는 정말 존재하는가. 특히 인간은 다른 생물에 비해 하는 게 너무 많다. 긴 교육 과정을 거쳐 올바른 사고방식을 정립해야 한다. 경제 활동을 하여 자금이 부족하지 않게 해야 하며 모든 걸 행하는 과정 속 수많은 타인과 얽히고설키며 수천 개의 감정을 느끼고 완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동물 혹은 식물처럼 언제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저 제자리에서 묵묵히 호흡하거나, 기약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불가하다.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대화, 감정, 활동 없이는 살 수 없는 체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 이를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부터 벌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 인간은 약하다. 그토록 아등바등 생계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써도 인간은 쉽게 아프고, 쉽게 죽는다. 순식간에 허무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인간은 약해. 돌연 명치가 뻐근해졌다. 놓치고 있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토록 삶은 벌이라며 목 놓아 외쳤으나 사찰에 가서 엎드려 기도했다. 제게 오는 액운이 있거든 걷어가 주십시오. 나의 안녕을 간절히 빌고 돌아선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사실은 가장 부정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벌을 받고 싶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스물다섯의 나는 이대로 삶이 벌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정말 괜찮은 걸까. 괴로움보단 즐거움을, 결핍보단 충족을, 불행보단 행복을 차지하고 싶다. 벌이 아닌 포상 같은 삶. 마침내 빗나감 없이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갈망하는 건 포상 같은 삶이구나. 기준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어떤 것이 포상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벌은 받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정말이지 잘 살고 싶어.
삶 같은 벌.
벌 같은 삶.
마음속 도미노가 쓰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