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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May 26. 2019

엔트로피의 바다에 떠있는 섬들

‘아직도 가야 할 길’ 북 리뷰


도입

청년시절 교회 다닐 때 권장도서로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만났다. '나니아 연대기'로 많이 알려진 그는 15세 때, 다니던 성공회 교회를  반항하듯 떠났다가 서른이 되어 탕자처럼(그의 표현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신앙에 헌신해 주옥같은 저작물들을 남겼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으며 C.S 루이스가 떠올랐다. 이 책은 스캇 펙 박사가 42세에 쓴 첫 저작이다. 집필 이후 그는 불교도에서 크리스천으로의 개종을 공개 선언하고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하는 글쓰기에 매진한다.


나는 영적 탐구에 관심이 많긴 하나 종교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영적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종교적 형식으로 영적 탐구에 나서는가는 각자의 자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를 떠난 것은 C.S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무신론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영적 호기심을 갖은 채 불교와 명상 등 몇 가지 체계를 탐구했다. 더 이상 특정 종교에 귀의하지 않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종국엔 루이스나 스캇 펙처럼 기독교에 천착하게 될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서 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임상적 한계를 느꼈던 듯하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실체적 악의 존재를 무찌르기 위해 절대자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같은 것이리라. ‘사랑, 전통적 가치, 영적 성장에 대한 새로운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통해 이와 같은 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소개

스캇 펙 박사는 하버드대학(B.A.)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M.D.)에서 수학한 후, 정신과 의사로 10여 년간 육군에서 복무했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그의 저작들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는『아직도 가야 할 길』,『끝나지 않은 여행』, 『그리고 저 너머에』 등이 있다. 그는 일생 동안 ‘자기 훈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때문에 진정한 자기 계발서의 원조라고 평가할만하다. 개인을 넘어 사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비영리 기관 '공동체 장려 재단(FCE)'꾸리기도 했던 스캇 펙은 2005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책에 대한 배경과 이야기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발가벗긴다.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그의 묵직한 이야기는 독자를 내적 심연으로 빨아들인다. 미국 내에서 그가 치료자를 넘어 영성가로 각인되는 이유이다. 그가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지 않았을 때 쓴 이 책은 지금까지도 종교를 넘어 꾸준히 추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성경처럼 가까이 두고 이따금 꺼내어 새겨 읽어볼 만하리라.


책의 구성과 요약


삶은 고해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다. 


짧고 직설적인 문장이 가득한 책의 첫 번째 주제는 '훈육'이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일 수 있는 것은 말속에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달콤하지 않으며 힘들다는 사실을 마주하기 두려워한다.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도구로서 저자는 훈육을 제안한다. 그것은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기, 책임지기, 진리에 대해 헌신하기, 균형 잡기로 요약된다. 즐거움을 미룰 수 있다는 것은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는 순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주도적이며 품위 있게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 완성되는 자기 존중을 통해 얻어진다. 자기 주도적인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은 외적 상황에 종속된 삶을 살며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선택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려 우리들 대부분은 매일 그 생득적 자유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 우리는 왜 선택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현실을 바로 보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 용어로 '메타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했음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 현실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지도 삼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꾸준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기 성찰을 통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라고 주문한다. 우리의 비 본능이 제2의 본능이 될 때까지. 우리가 성장해야 할 이유이며 과거의 익숙함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우울증은 건강한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두 번째 주제는 ’사랑’이다. 스캇 펙은 진정한 사랑을 적극적인 영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사랑에 빠진다'라는 흔한 말보다 '사랑을 만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마치 쓴맛나는 아이스크림과 같은 느낌일 지 모른다 . 그러나 저자의 말을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우리의 동물적 본능이 우리를 속여 결국 결혼이라는 함정에 빠트리는 과정일 뿐이라는 주장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사랑이라는 신비를 탐구하기 시작하며 그 모든 과정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축구경기에서 리베로는 상황에 따라 공격수가 되기도 때로는 수비수가 되기도 한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보다 움직임이 부지런하며 의존적이지 않고 자유롭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리베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역할에 묶여 상대의 의무에 기대야 한다면 우리의 성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우리는 리베로로 태어났다. 누군가를 애정함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애완동물을 돌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랑이 그 본연의 가치를 찾으려면 사랑이 느낌이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느낌은 그것이 유지되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며 의존적이 된다. 의존관계는 서로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상대의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이며, 모험에 대한 헌신이며 불안정을 맛보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알아차려 삶의 본질을 마주하는 것이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통해 타자의 개별성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선형적인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영원한 카이로스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이다.
당신을 통해 태어났지만 당신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줄지라도, 생각을 줄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육신은 집에 두지만 그들의 영혼을 가둘 수는 없다.
그들의 정신은 당신이 갈 수 없는 미래의 집에 살며,
당신의 꿈속에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애써 닮으려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된다.
인생은 거꾸로 가지 않으며 과거에 머물러선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활이 되어
살아 있는 화살인 아이들을 미래로 날려 보내야 한다.
궁수는 영원의 길 위에 있는 표적을 겨냥하고
하느님은 그의 화살이 날렵하게 멀리 날아가도록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의 팔을 구부린다.
궁수의 손에 들어간 힘을 당신은 기뻐하리라.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그 자리에 있는 활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


영적 성장이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해 보다 더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장이다. 굳이 윤회론을 빌려오지 않아도 성장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삶의 목적을 망각하는 것은 자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램되었다. 모든 사실에 대해 주체적인 의심으로 출발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부모라 할지라도 말이다. 부모의 종교에 반항하고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 세계관이 우리의 탐구와 성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 목적, 죽음 등이 문제 될 때 간접 지식은 소용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언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현대에 들어 과학은 보편타당한 지식의 체계로 자리 잡았다. 인식을 확장하고 성장하는데 유용해서 과학을 종교로 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심지어 일류 심리치료사들은 종교를 적으로까지 인식하는 상황에 이르며,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아편으로 까지 규정했다. 종교의 비합리성은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성장 본능을 저하시킨다고 보았다. 과학자들이 품고 있는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스스로 시야를 좁히는 것이며 자칫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은총'이다. 생명을 부여받고 삶을 누리는 것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보편적인 은총이다. 신학에서는 이를 두고 '일반 은총'이라고 한다. 개인마다 다소간의 차이는 개별적 관계와 연결의 복잡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은총은 우리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 원류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찾고자 하였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현재로서는 기적과 은총은 어느 한 곳을 원류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p382

만물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트러지고 분해된다. 물질계를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육체는 노쇠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능력은 늙지 않을 수 있다. '늙지 않는다'라는 대신 '늙지 않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 엔트로피의 바다에서 저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타이타닉'의 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배에서 탈출에 추운 바닷물에 빠져있는 두 주인공은 차디찬 바다에서 떠다니는 난파물을 붙들고 구조를 기다린다. 잠들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면서. 스캇 펙은 그 엔트로피의 바다에서 서로 성장을 위해 격려하는 그 힘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인간애 중에서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력화하는 기적적인 힘이다. 그 기적의 힘을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가 성장하기를 하느님은 우리에게 소명으로 맡겼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이며 사랑은 곧 하느님 자체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힘의 근원이며 종착지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알파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시작과 끝이다.


엔트로피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 앞에서 하나님의 말을 되새기는 대신 뱀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내면에 있는 올바른 지혜와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면 속에서 일어날 논쟁의 고통을 회피했다. 고통을 마주하기 두려워 팩트체크를 게을리한 것이다. 무의식 속에 박혀있는 게으름의 원죄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악'이다. 저자는 악이란 영적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자아 확장을 막으려는 정치적 권력 행사라고 말한다. 단순한 게으름은 사랑이 아닌 것에 불과하지만 악은 사랑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악들이 우리와 공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밝음으로 악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다. 각자의 무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신성의 조각들이 알파와 오메가로 이 땅에서 온전히 완성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성경이 실현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찾을 수 없다. 두꺼운 책의 분량 내내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펄떡거리는 횟감처럼 도마 위에 날것 그대로 끄집어낸다. 독자는 그 논의의 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선택은 하나다. 책을 덮고 아담과 이브가 되거나 논의에 뛰어들어 적극 참여하는 선택이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바다에서 섬으로 저항하며 살아가는 힘이 되고 다른 섬들과 연대하는 지혜를 얻는 길이다.


"부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받은 자는 적다"라고 한 성경의 구절처럼 모든 사람이 은총의 부름을 받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막다른 골목을 마주쳤을 때, 혹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섰을지라도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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