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낭독을 위해 궁금한 것들
어린시절 도심의 빌딩에는 주산학원, 타자학원 펜글씨 학원들의 간판이 많았다. 암산을 하는 꼬마가 출연해 놀라운 암산실력을 시연하는 모습을 TV에서 자주 보았으며 '차트병 모집'이라고 쓰인 모병 포스터도 눈에 많이 띄었다. 업무용 문서작성과 수식 계산 수요를 컴퓨터 대신 사람이 감당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깔끔한 글씨와 계산 기술을 익히는데 힘을 쏟았다. 지금은 어떤가. 컴퓨터를 손에 들고 다니며 그런 기술쯤은 이제 일도 아니게 되었다. 대신 글쓰기와 스피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젠 그것이 더 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방송일을 한다. 올해 말이면 만 25년째다. 그러나 여전히 말을 잘하기 쉽지 않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것은 사실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말은 소통이 목적이다. 매끈하게 잘하지 못해도 소통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며 별일 없이 잘 산다. 그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욕망하며 말을 잘하고 싶은 걸까? 말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에는 말이 있었다.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억될만한 연설이 빠진 적이 없다. 가깝게는 주변에 사람 셋 이상이 모이면 그중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 분위기를 이끌지 않는가.
조선시대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전기수는 이야기를 구연해주는 이야기꾼이다. 지금으로 치면 유뷰브 크리에이터쯤 될 것같다. 전기수들은 서민들의 문화적 목마름을 적셔주었는데, 정조 14년, 장터에서 전기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기수의 구연에 몰입한 나머지 이야기를 듣던 한 남자가 실제로 착각해서 사단이 벌어졌다. 정조는 백성들이 소설에 빠져드는 것을 싫어했지만 구전, 구연은 서민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소박한 수단이었다. 중국에는 설서, 샹성, 일본에는 라쿠고가, 쿠바에는 락토라는 이름으로 전기수들이 활동했다.
낭독에 대해 사람들은 대게 '잘 읽는 것'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배우는 기술로 생각한다. 적극적인 서사 전달 의지를 담은 낭독을 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내레이션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각종 안내멘트, TV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내레이션을 소비한다. 주로 소비자로서 낭독을 향유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낭독을 좋아한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이기 때문에 평안을 느낀다. 또한 낭독을 하면 자연스럽게 호흡과 발성이 몸에 활력을 주어 건강해진다. 시조창이나 노래, 웃음을 통해 지병이 호전되고 만트라나 성가가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가 깔려있다.
일과 관련해서 많이 받는 질문이 몇 가지 있다. 긴 뉴스 원고를 어떻게 다 외우느냐는 것이다.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 그런 질문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그리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방송은 물론 연설은 원고(대본)가 있다. 연사가 역할에 맞게 원고를 소화해낸다. 원고나 프롬프터에 담느냐 머릿속에 담느냐의 차이이다. 프롬프터는 화자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어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가수들이 노래할 때도 프롬프터를 사용한다. 대중 앞에서 특정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는 스피치는 프리토킹이 아니다. 그것은 낭독이다. 스피치는 낭독에서 시작된다.
낭독자의 몸은 악기에 비유할 수 있다. ‘몸’이라는 악기를 최대한 잘 사용해야 한다. 발성기관과 조음기관에 대한 이해와 훈련은 빠뜨릴 수 없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있다. 1971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앨버트 메라비언 교수가 발표하였는데 ‘행동의 소리가 말의 소리보다 크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요소를 청각적(목소리 표현), 시각적(행동 표현), 메시지(말의 내용)로 나누고 각각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을 연구했다. 그 결과 화자의 용모(의상)나 제스처 등의 시각적 요소는 55퍼센트, 목소리의 톤이나 발음 등의 청각적 요소는 38퍼센트, 말하는 내용의 완성도 등 메시지 요소는 7퍼센트를 차지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을 때 말하는 이가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는가에 집중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목소리 표현과 행동 표현인데, 그중에서도 준언어인 행동 표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의 이같은 속성을 잘 이해하여 낭독 훈련에 고려해야한다.
좋은 낭독과 내레이션은 무엇일까. 대체적으로 호흡, 발성, 발음을 내레이션의 요소로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 메라비언 법칙을 적용해보면 시각적인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다.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목소리는 각 사람의 개성이어서 한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긴장하지 않은 목소리를 말하며,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말한다. 좀 더 덧붙이면 톤이 낮으면서 차분한 목소리, 불필요한 떨림이 없고 당당한 목소리이면 좋다.
낭독의 요소 가운데서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호흡은 나머지 모든 요소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리를 내는 모든 일들은 복식호흡을 강조한다. 성악가 연극인, 성우, 아나운서 등은 호흡으로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우리는 태어나 복식호흡으로 세상과 만난다. 성장하면서 점차 흉식호흡으로 이동하며 나이가 들면서 호흡은 점차 얕아진다. 낭독에 있어서 복식호흡은 마치 배기량이 큰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한다. 폐활량이 커서 한 호흡으로 단번에 힘차게 말을 소화할 수 있다. 좋은 울림, 안정적인 음색을 만들어준다. 우리의 말은 복식과 흉식호흡이 적절하게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소리를 낸다.
좋은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흐름이 막힘없는 상태를 말한다. 코로 숨이 들어와 기도를 통해 폐를 거쳐 배를 충분히 부풀렸다가 입으로 날숨이 되어 나가는 동안 걸림이 없는 흐름이어야 한다. 관건은 공간 확보이다. 입안의 공간, 목구멍의 공간, 그리고 숨을 머금을 수 있는 폐의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 호흡 훈련은 바로 이 공간들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을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성악가들이 노래할 때 대중가수들과 달리 과장되게 입을 벌리고 턱을 목부분을 아래로 당기는 것은 그 공간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다. 입과 목구멍의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마치 빨대가 꺾인 것처럼 공기가 원활하게 전달되지 안는다. 협착이 생겨서 목이 건조해지고져 허스키 보이스가 되며 이물감이 생긴다.
호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발성이다. 소리는 육성, 비성, 가성, 흉성, 두성으로 분류된다. 육성은 목소리를 말한다. 비성은 비강을 통해 울리는 소리로 매력 있는 소리를 만들어 준다. 성악에서 벨칸토 창법을 통해서 체계화되어 있다. 가성은 자신의 음역을 넘는 높은 소리로 노래할 때 부분적으로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흉성은 가슴에서 울림을 주는 소리로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두성은 소리를 올려 두강의 울림을 이용하는 소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발음은 입모양과 혀의 위치로 결정된다. 단어 말미의 모음에 따라서 입모양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수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입모양이 크고 정확하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 입모양에 대한 훈련을 많이 받는다. 가사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혀의 위치는 초성 자음과 중성 받침소리에 영향을 준다. 혀의 위치가 정확치 않으면 말이 어눌하게 들려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대표적으로 혀 짧은 소리를 들 수 있다. 각자의 발음 습관에 따라 개인 교정과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훈련법을 이 자리에서 모두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적용해야 하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통으로 적용될 것들만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편안한 흐름의 호흡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을 긴장하지 않고 하는 것이다. 마치 요가나 호흡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깊은 들숨 이후 입을 크게 벌려 '하아~'하며 숨을 내쉰다. 처음엔 호흡만 내뱉고 점차 소리를 조금씩 실어서 9:1, 8:2, 7:3... 식으로 소리를 실어가면서 ‘아~'소리를 싣는다. 공기반 소리반 5:5로 마무리한다.
복식호흡 훈련도 여러 방법들이 있는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적용해본다. 여기서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고개를 젖히고 배에서 입으로 스타카토로 힘차게 끊듯이 '하! 하! 하!' 하면서 배에 힘을 주어 공기를 쏘아준다. 다음 단계는 그 감각을 살려 '아! 아! 아!' 끊어서 강하게 뱃소리를 밀어준다. 이 방법을 기초로 응용해서 길게 복성의 울림을 느끼며 '아~~'하면서 길게 해 볼 수도 있다. 그 복성의 울림이 느껴지면 같은 방법으로 '안녕하세요~'같은 말을 하면서 말로 감각을 이어 본다. 이렇게 연습을 하고 나면 복식 발성의 느낌이 조금 살아나는데 그 느낌으로 짧은 문장들을 읽어보며 적용해본다.
이런 연습과 낭독 훈련은 역시 매일 조금씩 하는 것이 좋다. 지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배움을 통해 얻는 명시적 지식과 익힘을 통해 얻는 암묵적 지식이 있다. 낭독을 익히는 과정은 이 두 가지 측면이 다 필요하지만 특히 암묵적 지식을 몸에 체득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그의 언어 이론에서 '랑그'와 '파롤'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 자체를 랑그라 한다면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각 사람이 각자의 개성에 맞게 말로 발화하는 과정을 '파롤'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내레이터는 말의 랑그를 정확히 이해해야하며 그것을 정화하게 구현할 수 있는 기술도 체득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좋은 낭독자로서 반은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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