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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Sep 15. 2019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베르트들에게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리뷰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고, 인종차별주의는 해악이며, 모든 소수자들, 다시 말해 다수와 다른 이들에 대한 박해는 혐오스럽다. (중략)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 명제들이 민주주의처럼 많은 피와 투쟁으로 획득했으나 자칫 방심하면 언제든 무너지기 쉬운 허약한 가치임을 일깨운다 - 412쪽 옮긴이의 말


저자 브누아 필리퐁의 작품은 영화로 시작되었다. 영화「어느 날 사랑이 걸어왔다(2010)」, 「뮨, 달의 요정(2015)」을 감독하였다. 필리퐁은 유년시절부터 만화와 영화에 심취했다. 특히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베르트랑 블리에, 프랭크 밀러의 영화들에서 영향을 받아 무거운 주제를 블랙 유머로 가볍게 다룬 첫 범죄소설 『꺾인 사람들』(국내 미출간)을 출간했다. 개성 있는 캐릭터와 극적이고 비유적인 상황, 범죄소설 코드를 적절히 활용하고 전개는 독자를 단숨에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과 횡포, 아동 학대, 사회적 약자 비하라는 오래된 난제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담겨 있다.


루거총은 1, 2차 대전에서 독일군 장교들이 사용했던 권총이다. 독일군과 함께 영화에 자주 등장해 낯설지 않다. 디자인이 아름답기까지 한 이 총은 소설 속에서 베르트의 삶을 관통하는 오브제이다. 2차 대전이 종국을 향해 가고 있던 어느 날 베르트의 집에 들이닥친 나치 친위대원, 난폭하게 그녀를 유린하려 했던 그와 혈투 끝에 루거총 한 자루가 전리품으로 남겨진다. 아이러니하게 침입자의 무기는 나나 할머니를 대신해 베르트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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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이 수군댈 걸 걱정하는 거야.....?인생은 짧아, 이것아......., 세상의 규칙 따위....... 아무 상관없다고........., 살아야 해........., 할미 말 들어!



수호천사 나나 할머니가 베르트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리고 베르트는 자신의 자유를 향한 전사로 거듭난다.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올가미가 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진다. 우리는 강요된 통념이라는 덫들로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힘겹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시종일관 베르트와 베르트를 지켜보는 주변의 시선 사이에 독자를 몰아넣고 질문을 던진다. ‘베르트의 행동은 정당했는가’, ‘당신이 베르트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베르트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에 대해 허울 좋은 도덕과 관습으로 세뇌되어 쉽게 단죄하려는 우리들의 뇌를 작가는 루거총으로 박살내고 있다. 루거 총으로 무장한 주인공이 스스로가 괴물인지 자문하는 모습은 독자를 고민에 빠뜨린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느꼈던 통쾌한 즐거움과 가볍지 않은 주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홀리데이’에서도 이러한 먹먹함은 반복되었다. 홀리데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며 80년대 후반 우리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행각을 그린 영화다. 인질로 잡혀있던 고선숙(당시 22세)은 탈주범들이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하면서, "내 동생들은 왜 그들을 "영일이 오빠", "의철이 오빠", "광술이 오빠" 혹은 "강헌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까"라고 했다. 혹자는 이러한  인질들의 행동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반론을 펼지 모르겠다. 범인들은 차별 없는 그들의 이상향을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으며 꿈꿨다. 마지막까지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왔던 그들의 '홀리데이'는 유혈 낭자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김병수가 겹쳐졌다. 김병수와 베르트는 나이도 살인의 동기도 살해 방법도 달랐지만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연쇄살인범 김병수는 딸처럼 키우는 은희를 지키고자 했고, 베르트는 사회적 통념으로 침해받지 않을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 싶어 했다. 물론 베르트의 경우,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살해 동기가 간단치 않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페미니즘적이기도 하고 소수자와 인종 차별을 드리운 폭력에 대한 처단이기 때문이다.


102세의 연쇄살인범 할머니라는 비현실적 설정만큼 소설 전개는 독자의 몰입감을 끌어낸다. 전쟁이라는 상황과 상관없이 홀로서기하는 여성들에게 세상은 언제난 전쟁터였다. 사회적 통념 속에 그녀들의 생존권과 성적 향유권은 남성들의 폭력으로 길들여지고 침해받았다. 가해자들을 넘치게 응징하는 베르트의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베르트들만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성장판 독서모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고 썼으며. 서평의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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