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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Sep 15. 2019

[성장판 서평단 2기]나도 루거 총에 맞았을 것 같다.

브누아 필리퐁,루거 총을 든 할머니

탕! 탕! 베르트는 총을 쏜다. 죽였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여자라는 이유로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머저리들을 죽였다. 난 머저리일까? 아닐까?


베르트는 100살이 될 때까지 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과격하고 다혈질이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그에게 총을 쏘도록 강요한 걸까?


브누아 필리퐁의 소설은 흥미로웠다. 구성도 좋고 내용도 좋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건 할머니가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할머니 연쇄살인마라는 거다.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르고, 루거총으로 죽인다.


그녀는 5명의 남편을 만났다. 그녀의 남편들은 그녀를 때렸다. 존중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든 그 소유물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인형이어야 하고 자신의 지시를 공손히 이행하는 노예 여야 했다.


그러나  베르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뒤틀린 남성성의 상징들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버린다. 그런 존재들을 자신의 지하실에 묻어 버린다.


그녀가 보여주는 거침없이 사는 생의 즐거움은 욕구불만인 어떤 이들에게는 모욕의 상징이었다.
p205

그녀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모욕이었다. 그녀와 같은 자유를 누구나 원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무섭고 두려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자유는 부도덕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내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와 불만들은 모두 그녀의 탓이 되어 버린.


"할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요, 그 아저씨들이?"
"날 학대했어."

학대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작가는 학대에 대한 법의 응징이나 사회적 구속력이 형편없었음을, 지금도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법의 심판보다는 베르트의 루거가 그들에게 더 가까웠다. 더 실제적이었다.


난 머저리일까?

난 머저리일지 아닐지 생각해봤다. 베르트를 만났다면, 운 좋게(?)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웃고 떠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래야만 남자다운 거라 생각했던 지난날의 머저리가 떠올랐다. 남자들의 세계에 끼기 위해 더 그런 농담들을 해댔던 10대 20대의 내 모습이 지금도 보인다. 난 머저리다. 루거에 맞고 지하실에 묻혔을 거다. 베르트와 결혼했다면 반드시 그랬을 거다.


영화감독이었던 작가답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장면이 하나 하나 그려젔다. 몰입도가 굉장히 좋았고 재밌었다. 단지 흥미위주의 소설이 아니었다.


메시지가 묵직했다. 내가 머저리였음을 깨닫게 해 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고맙습니다. 베르트. 브누아 필리퐁. 그리고 루거.


(이 글은 성장판 독서모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고 썼습니다. 서평의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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