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성과 유한성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부분적 소고

by 타마코치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책을 즐겨 듣는다. 오디오북의 프로그램화된 기계음의 낭독은 내용이 잘 안 들어온다. 유튜브를 뒤적거리다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듣게 되었다. 사람 냄새나는 낭독자의 목소리가 귀를 잡아끈다. 영혼 없는 달변에서 느껴지는 능글거림도 없고 담백해서 좋았다.


이 책은 2013년에 출간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계형 정치인을 그만두고 먹물의 삶으로 복귀하면서 처음으로 출간한 책이다. 물론 그는 이전에도 '후불제 민주주의(2009)', '국가란 무엇인가(2011)' 등 여러 권의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의 제목을 예전에도 몇 번 온, 오프라인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이 내겐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읽혔다. 예의 책의 목차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이어진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죽음이 있기에 인생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한다. '영생'과 '구원'이라는 말을 길거리 전도자의 외침을 통해 처음 접했다. 이질감을 느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영원히 산다는 말은 어린 내 머리로도 그렇게 행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이 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영생에 대한 작가의 변은 내가 어린 시절 못했던 답을 대신해주고 있다.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하루가 가치 있고 빛나는 것이리라.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카뮈의 물음은 정곡을 찌른다.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삶에서 의미를 재발견하고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각자의 다양한 떨림이 우리의 삶을 깨우고 더 깊은 울림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연대하게 한다.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역사적으로도 그 뿌리가 깊다. 불로초를 향한 진시황의 어리석은 꿈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전신의 혈액을 정화하거나 젊은 피로 바꿔서 생명을 연장한다는 엽기적인 이야기들이나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영구기관에 대한 끊임없는 시도들이 그렇다. 물질계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른다. 시간을 따라 만물은 흩어지며 결국 소멸되는 것이 이치이다. 우리의 수명이 아무리 늘어난다고 한들 언젠가는 그 엔트로피의 바다에서 사멸되는 것이다.


유한성은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실현되며 영원성으로 승화된다. 우리가 죽음을 어둡고 두렵게 느끼는 것은 그 통과의례의 순간이 가져오는 고통과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 또한 새로 태어남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이해를 할 때 변화의 고통도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고통을 생각하면 준비 없이 맞이하는 죽음이 나을지도 모른다. 마치 수명을 다한 배터리와 함께 멈춰버린 장난감 로봇처럼, 심장박동이 멎어 깨어나지 못하는 아침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경전들은 우리의 유한성이 영원성으로 승화되려면 죽음의 순간조차도 깨어있는 의식으로 그 과정을 명료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야 죽음이 죽음으로서의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줌 미련도 남지 않는 완벽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한 삶이 전제가 될 때 가능하다.


사는 동안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는 저자의 일갈은 후회 없는 삶, 미련 없는 죽음과 맥을 같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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