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의 목발, 동거인
외국살이의 머스트해브 아이템
킴. 주로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내가 두바이 사막 땅에서 첫 5년을 동거동락한 사이다. 내 손윗 사람이면서 내가 유일하게 말을 놓는, 내 나름의 내적 속옷같은 존재다. 외국인 노동자로 두바이에서 살며 삽질을 할 때 같이 삽질을 하거나 손으로 햇볕을 가려주고 물을 떠먹여 주던 사람이다. (진짜 삽질을 하진 않았습니다. 항공사 승무원이었죠.)
사회 초년생이면서 해외에 혼자 사는 일은, 내가 스스로 뛰어든 강물이지만 고달픈 일들의 연속이었다. 깨워주는 엄마도 없이 새벽 두 시나 시차적응도 채 되지 않을 때 쪽잠을 자다 깨서 비스킷 하나 입에 물고 출근을 했다. 영어로 브리핑을 참여하고 거의 모든 매 비행마다 낯선 사람 400명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혼자였다. 눈 뜨면 서바이벌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난 개구리가 채 되기 전에 뒷다리만 나온 채 땅에 기어 나온 반 올챙이나 다름없었다. 엄마도 없이 전장에서 살아남게 해 준 건 킴 덕이 크다. 실제로 우리 엄마는 내 결혼식에 와 준 킴에게 우리 딸 타지에서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킴의 안부를 묻는다.
킴은 나에게 치실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뭐야, 치실 안 챙겼어? 킴은 두바이에 도착해서 받는 5주의 승무원 훈련 교육 동안 자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식사 후 양치를 하러 같이 간 화장실에서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핸드백에서 칫솔만 꺼내자 머리가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국어로 싸우는 줄 알았던 옆의 금발머리 훈련생이 우릴 거울로 빤히 쳐다보다 황급히 자리를 뜨자 우린 웃기 바빴다. 요즘도 치실을 할 때면 나의 치아를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여겨 치실의 중요성을 열심히 설파하던 그녀가 떠올라 고맙다. 킴은 나에게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는 법도 알려줬다. 너 펭귄 같아. 어떻게 가운데만 발랐어. 온갖 튜토리얼이 다 있는 유튜브도 없던 시절, 에- 해봐 하고 벌린 입술에 립스틱 쓰는 법을 알려줬다. 킴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못먹는 것도 없었다. 두번째가 유일하게 나와 닮은 점이었다. 킴은 또한 사회 초년생이면서 금융교육을 철저히 외면하고 살던 나를 적금과 복리의 세계로 인도해줬다. 우린 n년간 매달 월급 수령일 앞뒤로 오프를 맞춰서 두바이 통장 출금-한국 통장 입금하는 의식을 같이 치렀다. 월급의 70프로나 적금에 붓던 때라서 약 보름 뒤엔 돈이 떨어졌다고 궁시렁대며 서로 얼마 남았나를 따지며 누가 밥을 살지 결정했다. 클럽에 한 번도 안 가봤던 나를 클럽에 물들인 것도(?!) 킴이었다. 당시의 우린 무슬림 기도 소리인 아잔에도 몰래 덩실덩실거렸다. 우린 서로에 대한 지극한 책임감으로 새벽엔 둘 중 하나의 숙소로 안전하게 귀가했지만(각자 숙소로 가기에 택시비가 아까웠거나 어차피 다음날에도 만날 생각에 그냥 한 명의 집으로 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치안이 좋은 두바이라지만 이십 대 두 여자가 밤에 나다니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많아서 아찔하다. 킴은 엄마가 사주는 옷만 입던 대학생이던 나에게 쇼핑하는 법도 알려줬고, 내가 운동화만 신던 대학생에서 9cm 스틸레토를 신고 스테이지를 정복할때까지 훈련시켰다.
킴은 초등학교 때 스케이트나 바이올린을 배우는 강남의 사립 명문 교육 시스템에서 교육받은 서울 여자였다. 나는 깡촌 시골 출신에 서울로 비행 다니기 전엔 강남엔 가본 적도 없었다. 내가 승무원이 되기 전에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를 세 번 타본 것과 비교해서 킴은 이미 대학시절에 유럽 배낭여행과 다른 나라에 살아본 경험도 있었다. 이미 운전도 잘했고 스스럼없이 돈을 모아서 얼른 차를 마련했다. 한두해 더 먹은 나이를 빼고서라도 내가 배울게 훨씬 많았다. 아마 킴이 실리를 따져가며 사람을 사귀는 성격이었더라면 나 같은 골수까지 나눠줘야 할 처지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킴은 가성비를 최고로 여기지 않는, 그녀만의 만물 계산 법칙이 있었다. 킴은 정이 많고 웃음이 많았으며 자기한테 많은 것을 나눠줄수 있는 불쌍한 나같은 사람만 골라 사귀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가 먼저 두바이를 뜨기 전까지 5년간 킴의 베프가 되어 그녀에게 기생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목발. 킴은 아직 다리가 두 개뿐이었던 올챙이에게 남은 두 개의 다리를 대신해준 내 목발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킴도 나도 20대의 어설픈 연애를 말아먹고 있던 차, 외국에 사느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보고 혼기를 놓쳐갈까 두려운 마음에 어느 날 우리 이러지 말고 듀오나 가연에 가입하자라고 충동적인 발언을 했다. 킴은 나와 다르게 실천이 빠른 사람이었고 조만간 결혼할 거라는 말을 만천하에 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안가 듀오나 가연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승무원 날개를 접는다고 나에게 통보했다. 킴은 회사에서 승객들의 칭찬을 통해서 뽑히던 우수사원에도 두 번이나 뽑힌, 진정 우수한 인인재였으나 회사나 킴 당사자보단 내가 가장 섭섭했다. 짧게나마 내가 외로움을 탄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킴은 두바이를 떠나기 전에, 당시엔 아직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형부를 두바이 어느 쇼핑몰에서 만나게 해 줬다. 그 쇼핑몰의 외벽은 새하얀 벽에 이슬람 문양이 레이스 조각처럼 새겨져서 특색 있었다. 쇼핑몰의 하얀 벽이 킴이 입을 웨딩드레스 같기도, 앞으로 결혼이라는 내가 모르는 다른 나라에서 펼쳐질 킴의 인생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 처음 보는 부산 남자가 나보다 자기가 더 킴을 잘 안다고, 더 사랑한다고 하는 거다. (물론 그렇게 말했을 리 없지만 그의 모든 말이 그렇게 들렸다.) 아닐걸요. 잘못 보셨어요 외에 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 말은 목구멍으로 삼키고 대신 넉살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과 그 옆의 모처럼 행복해 보이는 킴의 얼굴을 겹쳐보며 허허 웃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었지만 어쨌든 형부 될 사람을 먼저 보게 된 덕분에 나도 킴을 기쁘게 보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용감해서 킴을 아내로 맞이한 부산 사나이는 킴이 두 아이를 낳아 기르게 하여 더 이상 클럽엔 못 갈 몸뚱이로 만든 기가 막힌 나무꾼 책략을 완수했다. 브라보.
조리원 예약은 했어? 태아보험은? 내가 몇 년 뒤 결혼을 하고 킴의 뒤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서 임신 소식을 알리자 킴이 곧장 했던 말이다. 안 본 사이에 변한 건 없었다. 친정 엄마도 모를 일을 공유한 사이기에 이젠 각자 친정 엄마랑 싸우면 전화해서 서로 사과하라고 난리다. 두바이에서 산 8년 간 절반은 하늘에서, 절반은 땅에서 보냈다면 땅에서 지내며 흘린 피, 땀, 눈물, 웃음은 대부분 킴과 나눴다. 그때 살며 진 빚이 많은데 이젠 평생 곱씹으며 즐길 추억까지 킴에게 기생한다.
첫째 임신 때 인도 카레가 너무 당기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호소할데 없이 킴에게 전화했었다. 언니 그거 이름이 뭐지? 같이 비행을 한 수많은 동료 가운데 인도 카레를 기내식으로 종류별로 세 개는 먹고 거기다가 임신과 입덧을 다 해본 경험자는 킴 뿐이었다. 역시는 역시인것이 킴은 내가 그것이 그것인것 같은 카레 중에 딱 그 한가지를 채 설명하기도 전에 마치 코 앞에 갖다댄것 마냥 묘사를 찰지게 하며 정답을 알려줬다. 자기도 제대로 하는데 못찾아서 이태원까지 가서 먹고왔다면서.... 야 그거 생각나? 하고 가끔 느닷없는 안부 겸 대화를 나눈다. 우린 이제 주로 승객들 대신 각자 집에서 모시는(?)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지만 가끔 두바이 우리집 숙소 근처 아랍 물담배 냄새와 이슬람 아잔소리가 섞여 들리는 소싯적 이야기도 찰떡같이 나눠 먹는다. 앞으론 킴과 같이 먹은 음식들을 글로 써내려가며 그날의 맛을 소환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