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에서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적어내라고 했을 때 솔직했던 적은 단 한번뿐이었다. 화가. 그 외의 직업들은 ....어떨까? 하는 내 안의 호기심에 대한 대답이었다면 화가는 하고 싶은 일이 뭔지에 대한 확신이었다. 화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과 다르게 백과사전을 열어보지 않고도 정확히 무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고 알기에 내 생활 반경과 지식은 겨우 첩첩산중 시골에 있는 우리 집의 책장 크기였다. 커가면서 화가에도 여러 분야가 있음을 차차 알게 되었고 친구들 중에 나보다 더 미술을 잘하는 친구들이 있단 걸 알아가면서도 기죽기는커녕 그들의 영감과 근원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우리는 아빠가 지은 집에 살았다. 빨간 지붕이 얹어진 하얀 이층 집은 시골이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논밭 사이에 있던 다른 집들과 다르게 보였다. 내게 미술은 그런 과목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집, 평온한 시골이지만 무료해서 어딘가 불안하게 하는 그런 곳에서 내가 있어야 할 유일한 곳.
아빠는 공무원이면서 예술가셨다. 나는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빠의 화구통 안의 갖가지 색연필과 무르기가 다른 연필들, 목탄과 파스텔, 붓과 신기한 냄새가 나는 물감들을 탐색했다. 종이 반죽으로 창작물을 만드는 것을 도울 땐 아빠가 창작 활동에 끼워주는 것을 즐겼다. 동생이 어항에 빠뜨린 건 리모컨 같은 게 아니라 데생 연습에 쓰던 아그리파 석고상이었고 심지어 우리 집엔 미국 범죄영화에나 나올법한 필름 현상을 하기 위한 암실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빠 어깨 너머로 콜라쥬 기법을 배우고 조각도의 종류를 배웠다. 여하튼 우리 남매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술교육을 받은 셈이다. 봄가을마다 우리 남매가 아빠를 따라서 각자의 화구 세트를 챙겨 들고 그림 그리러 다니던 때의 즐거워 보이는 사진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사진, 아빠가 엄마 퇴직금을 털어서 카메라를 산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되는데 아빠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 30년 넘게 욕먹을 각오도 대체했다.
아빠의 엄마, 우리 친할머니는 아빠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을까 봐, 예술인만의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로 남은 인생을 탕진할 것 같은 걱정과 편견에 말리고 말리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는 대학을 나와 멀쩡한 직장을 다니면서도 미술대학을 따로 다니셨고 예순이 넘어서도 그림을 그리신다. 아빠의 궁극의 마스터피스를 향한 열정은 끊임없이 눌러대던 카메라 셔터와 스케치북 사이를 달리는 연필로 표현되었다. 그 와중에 아빠는 딸이 미술에 관심있어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셨다. 내 반짝이던 장래희망이 겨우 생활기록부에 잉크로 남게 된 사연도 아빠와 다르지 않게 된 거다. 여자가 예술을 하면.으로 시작되는, 할머니 적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편견을 거르지 않고 거기서 자신이 받은 안타까운 절망의 색은 씻어내지도 못한 채 내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포기했던 것 같다. 중학교에서 동아리 모집을 할 때 미술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보단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던 방송부에 들어갔다. 실제로 2년간 아침방송 명상의 시간 멘트를 쓰느라 사춘기를 곱게 보낸 것과 체조시간에 방송부에서 기술을 맡으면서 체조를 안 나가도 됐던 건 내가 어림짐작했던 그 실용성을 보장받는 일이긴 했다.
대대로 이어지는 쓴 뿌리가 어찌나 질긴지 큰아들은 미술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아직 3살, 1살이던 두 남매를 혼자 보느라고 많은 활동을 해줄 수 없었던 나는 그나마 내가 좋아하고 내가 쏟는 에너지 대비 아이의 집중력과 흥미를 끌 수 있는 미술 활동을 많이 했다.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은 만 2세였지만 붓을 들게 했고 목탄과 백묵도 쥐어주었다. 목욕놀이 시간도 연장시키려고 물감을 들려 보냈고 돌과 나뭇잎에도 그림을 그렸다. 아들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유리창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찰흙과 밀가루 반죽에 두 시간도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나는 밥을 하고 둘째를 돌보거나 책을 읽고 대부분은 같이 그렸다. 첫째가 그림실력이 늘 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땐 뭔지 모르게 불길한 마음이 내 안에 스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도 아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책의 표지를 직접 그려서 만들어주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이 작은 화가가 이미 내가 이룬 꿈인 건이 깨달아졌다. 나는 결코 화가가 되지 못했지만 내 마스터피스가 눈 앞에 있었다. 미련없이 꿈을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청솔모가 겨울에 먹으려고 숨겨둔 도토리가 눈 앞에서 나무로 자란걸 보는 심정도 들었다. 재능 여부를 떠나서 더 이상 이 작은 아이가 소중하게 손에 쥐고 있는, 흙마당에서 찾은 예쁜 조약돌 같은 꿈을 뺏어내는 식의 되물림은 없어야겠단 각오가 서기도 했다. 최근에 여섯 살이 된 아들이 그림 그린걸 본지가 오래다. 로봇과 인형들 사이에서 역할극에 몰두하며 바닥에 엎드린 아이의 상상 속 대화를 엿듣는다. "내가 해줄게, " "아니야 나도 할 수 있어." 길을 찾다 넘어진 친구 로봇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자기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흠칫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졌다. 어쩌면 나의 아이도 커가며 나도 모르게 심어준 편견 때문에 미술보다 뭔가 실용적이고 세상에서 비교적 생산적으로 여겨지는 일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쏟아낼수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생산 자체인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느새 미술보다는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숫자와 바꿀만한 가치들에 휩쓸리기 전에 아이가 가진 능력은 미술이나 다른 어떤 기술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단디 알려줘야겠다. 장래희망은 수십 번 바뀌었더라도 내 가치가 너 하나만으로도 증명되었듯이, 너도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