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친구의 집

바다 앞에서의 회상

by 창문수집가

중간고사를 끝낸 조카와 바다를 다녀왔다. 조카는 나와 취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예뻐하던 아이였는데, 식구는 아니기에 오히려 편하다. 조카와 있을 땐 우리 집 꼬마가 잘 보이지 않아서 좋다. 사춘기의 기세로 초등학생 수다를 잠재워주는 고마운 조카.


조카는 바다 앞에서 친구에 대해, 친구의 집에 대해 말했다. 나도 꼬깃꼬깃한 옛 친구 이야기를 펼쳐서 들려주었다. 대문 안에 구릉이 있고, 조각상도 있으며, 거실 앞엔 복도와 자동문이 있던 옛 친구의 집.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특히 다른 점은 없었는데, 그 친구의 집은 많이 달랐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부잣집은 드물다. 친구들은 다 비슷했는데, 그 친구의 집에 가면 많이 달랐다. 놀라서 제대로 못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가 나를 자주 초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친구의 집은 어딘지 편하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는, 상가 2층에 살았다. 친구를 따라 올라가니 철문이 있었고, 들어가자마자 금빛 불상이 좁은 방에 가득 차있었다. 불상은 올려다봐야 할 만큼 매우 컸는데, 방은 아주 작았다. 다른 방은 없고 친구의 책상이나 식탁 이런 것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건 바닥에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금빛 불상이 나를 계속 보고 있으니 숨 막혀서 제대로 못 놀았다. 빨리 나가고 싶어 하던 나를 붙잡던 친구가 지금 생각하니 안쓰럽다.


다른 친구네 집에는 정말 맛있는 밥상이 있었다. 그 집의 구조나 물건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집엔 엄마가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그 친구의 엄마, 엄마의 맛난 밥상의 가치를 잘 모르는 내 친구. 감사할 줄 모르는 내 친구를 보며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맛있는 밥상이 매일 이어지다니, 내 친구는 임금님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은 계단과 붙박이 책장 등 나무 조각으로 장식된 소품이 많은 예쁜 집이었지만, 빛이 잘 들지 않아 집의 예쁜 부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옆집, 앞집,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창을 열면 언제나 옆집과 앞집이었다. 작은 단풍나무가 있는 앞마당이 이 집의 숨 쉴 틈이었는데, 송충이가 여럿 살고 있었다. 엄마가 꾸민 가로세로 2미터 정도 되는 잔디 공간이 있었는데, 쉬거나 앉을 수는 없고 그냥 잔디님을 모신 단이었다. 잔디공간엔 계단도 있어서 그냥 이상했다. 쓸모없어 보이는 공간이랄까. 하지만 엄마에게 그 잔디는 소중해 보였다. 지금도 우리 엄마는 여전히 그런 예술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조카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학교 시험을 준비하는 요즘 학생들을 말했다. 중간고사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기말준비를 해야겠다는 조카. 시험이 이제 끝났는데 곧 다시 시작이다. 응원의 말을 건넬까 하다 그만두었다. 우리 앞에는 쉬지 않고 철썩이는 바다가 있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할 때가 있다. 어릴 땐 가족이고 식구니까 다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우리 가족의 기분을 서로 알아주기 위해 냉장고에 무드미터를 붙여두었다. 처음 붙일 때는 마음도 시원해지고, 남편이나 아이랑 기분에 대해 서로 얘기하겠거니 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 진짜 감정이 아니라 나의 바라는 희망 감정에 내 얼굴 자석을 붙인다. 내 지금의 감정을 알게 되면 남편과 아이가 걱정할까 봐 함부로 내 마음을 드러내기 어렵다. 요즘도 그런 연속이다. 철썩이는 바다처럼.


하루를 마무리하며 설거지하다 현기증이 날 때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내 발가락은 그렇게 내가 쓰러지지 않게 도왔다. 어떻게 해도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는데 해결책을 알 수 없던 날, 15층 계단을 올랐다. 엄마에게 '괜찮아 나 걱정하지 마' 말하며 가물거리던 나를 허벅지의 열기가 걱정 말라며 잡아주었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넝마 하나 걸치고 있던 날 딸아이가 빛나는 새 잎을 보여주며 이만큼 자랐다고 내 마음에 옷을 입혀주었다


남에게 한 덕담이 나에게 되돌아온다던데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투덜대다 지쳐 잠든 내가. 잠에서 깨어 내 얼굴을 본다. 그래도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다고. 나는 그런 철썩이는 마음으로 오늘도 숨 쉬고 있다.

keyword
이전 04화무상함 안에서 웃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