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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예정 Jan 21. 2020

공중 전화

결코 잊혀지지 않아.

입시가 끝났을 때, 학교에서는 3학년들에게 외부활동을 추가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역에 도착하고 친구와 만나 지하철을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박물관 여러개를 방문하며 설명을 들었다. 기억이 안 난다. 막상 기억에 남은 건 그 설명이 아닌 친구들과의 추억이었다.





60년 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과 배경들이 꾸며져 있는 박물관에 방문했다. 옛날 문방구에서 팔았던 불량 식품, 복고 느낌 가득한 그림과 사물들.


그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따뜻한 빨간색으로 가득 칠해진 공중전화였다. 좋은 장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침 친구들이 오고 있었다.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귀에다 대고 전화를 하듯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는 소리 없는 말소리. 그 말소리를 듣듯이, 나는 말했다. 내 앞을 지나가던 친구들이 멈췄다. 나는 태연하게 전화를 이었다. 어느 정도 친구들의 눈이 동그래졌을 때 마무리 멘트를 하고 수화기를 내놓았다.


B가 내 장난을 알고 있었던 A에게 물었다.     


- 진짜 전화 돼?


A 역시 태연하게 그런가 봐, 라고 답했다. B가 나한테 다시 물었다.     


- 진짜 전화 돼?


나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응, 진짜 신기해.


B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선생님도 내게 물으셨다.


-진짜 전화가 돼?     


나는 B가 안 볼 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아니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도 웃으셨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은 B가 내게 왔다.


- 전화 안 되잖아.


비로소 터졌다. 즐거움이. 친구에게 말했다.


- 저기 코드 연결도 안 되어 있어.


B가 뒤늦게 이리저리 부딪치고 있던 코드를 발견했다.  그 짧은 장난을 위해 열심히 연기했다. 친구가 내 장난의 미끼를 무는 순간, 기다림의 대가가 웃음이 되어 돌아왔다.


차이나타운에서 들었던 많은 설명 대신 친구들과의 웃음만이 기억에 자리 잡았다. 작동하지 않은 고물이 된 공중전화가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그 기억들의 태어난 덕분에 버려진 물건은 마침내 버려지지 않았다. 설령 버려진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의 기억들 속에 시들지 않고 살아있을 테지.


오래된 고물은 꼭 버려지지 않아도 된다. 능력을 모두 소비했다 하더라도 꼭 잊혀지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나와 당신의 삶의 이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존재가 사라져 간다면 잊혀지도록 지켜보는 것이 아닌, 내가 떠오르도록 알리면 되지 않을까. 나와 당신의 존재의 의미는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나로 인해 형성되어야 한다.


이미 망가진 공중전화이지만, 그 자체로 따뜻했다. 비록 설명이 아닌 웃음만이 기억에 자리 잡았지만, 그 덕에 지루했던 시간까지도 한 꾸러미로 모여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되새겼다. 

공중전화는 버려지지 않았다.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나 그리고 당신은 꽤 많은 사람의 응원을 받고 있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나를 기억해 주는 몇몇 사람들만 있다면, 나는 그 자체로 빛난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빛은 더 퍼져 또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비추는 온기 가득한 빛이 된다.





고장이 난 공중전화가 버려지지 않은 것처럼. 

다시 빛을 내어 나에게 온기를 준 것처럼. 

누군가에게 소중한 기억을 줄 수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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