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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예정 Jan 21. 2020

오늘은 다른 길을 걷고.

내 발자국이 남는 모든 길이 옳은 길이었음 좋겠어.



매일 같은 일상을 겪다가 처음 가는 곳으로 길을 틀면 기분이 묘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매일 걷는 길이 아닌 다른 길목을 걸었다. 다른 버스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새로운 정류장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걸었다. 이 생각은 걸음을 지속할수록 어느 순간 증발되어 사라졌다. 길이 익숙해서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을 때 증발했던 기억이 돌아왔다. 길을 잘못 걸었다. 익숙한 정류장으로 가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제야 길을 틀었다.


옳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던 내 길이 틀렸다는 생각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오히려 틀렸다고 생각한 방향이 알고 보니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다시 방향을 틀어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슬아슬하게 정류장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좋아하지만 매번 처음 가는 곳을 갈 때 느껴지는 그 기분은 꽤나 불안하다. 나는 길치였다. 중학생 때는 걸어서 십 분 거리를 반대 방향에서 버스를 탄 탓에 돌고 돌아 사십 분이 걸려 도착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부터, 처음 가는 곳을 불안해 했다. 몇 번이고 그 불안감을 견디고 걷고 걸었다. 처음 가는 곳들도 씩씩하게 가고 도착했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됐다. 처음 가는 곳도 씩씩하게 가는, 그런 나.




그래도 여전히 처음 가는 길은 늘 불안하고, 늘 새롭다. 새로운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같은 바깥만 보다가 모르고 있었던 세상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평범한 바깥이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길을 달리다가 목적지 정류장에서 내렸다. 또 씩씩하게 걸어어 일정들을 마쳤다. 뿌듯했다. 하루 동안 느꼈던 감정들 덕에 내가 얼마나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았는지 알았다. 내 친구들도 그럴까.


나는 겁쟁이였다. 새로운 길에는 늘 겁이 났고 몇 번이라도 더 가 본 길을 택했다. 익숙한 길만 걸으려 하다가 다시 새로움을 무서워하게 되버렸다. 비로소 떠올랐다. 나는, 처음이 겁났다. 막상 해내고 나면 금세 익숙해졌다. 두려움과 겁이 가득한 처음의 문을 열고 나면 처음의 감정은 사라지고 익숙함만 남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럴까. 버스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기로 숨을 쉬었다. 각자마다 서로 다른 숨을 내뱉으며 삶을 살고 있었다.





적막한 버스 안은 사색을 하기 좋은 곳이다. 언제든 바람을 맞이할 수 있고 새로운 풍경들을 볼 수 있는 창문. 도착할 때까지 자리만 지키면 되는 무던함. 내리기 전까지 창문 너머로 수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움직이는 미술관처럼 느껴진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버스 속에서도 바빠 보인다. 핸드폰을 하거나, 전화를 받거나, 잠을 자거나. 밖을 볼 여유가 필요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


왜 요새 사람들이 불친절한지, 알 수 있었다. 모두 힘들기에.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만한 여유가 없기에.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 여유가 없다. 버스를 탄 순간 만큼은 여유, 라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창 밖을 봤다. 아마, 고등학생 때부터의 습관인 것 같다. 바쁘게 돌아가는 수험생 생활 속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동안 내가 터득한 유일한 여유였다.


이십 분 가량의 여유를 만끽한 뒤 도착한 목적지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고, 또 그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 여유를 즐길 잠깐의 여유가 존재하기를.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발자국을 남기는 모든 길이 옳은 길임을.





집에 가는 길에 보았다. 커다란 달을. 환하게 빛나는 달을. 마치,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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