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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예정 Jan 21. 2020

잇몸이 아야 했던 기억.

졸업 후에 떠오른 고등학생 때 어느 날.

졸업을 했다. 그 기념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 보았다. 3년 동안 꼬박 적은 다이어리를 꺼내며, 수상 기록을 들춰 보며, 생활기록부를 넘겨 보며.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많이 담고 있었던 기록물은 단언컨대 다이어리였다. 생활기록부와 수상 기록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객관적이며 단순하다. 반면 다이어리, 내가 적은 나의 다이어리는 그때마다의 내 기분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다이어리 한 장, 한 장을 넘기다가 눈에 띠는 날이 있었다.



이빨이 아파서 학원 가기 전에 치과를 들렸다.
괜히 서러웠다.
며칠 아팠는데 이제야 가서.



학교가 조금 빨리 끝났던 날이었다. 잇몸이 부어서 꽤 아팠다. 그럼에도 바로 치과에 가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고도 나에게는 빽빽하게 일정이 있었다. 학원이라는 또 하나의 입시 장소를 가야 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하나의 사업을 행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저녁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오전 수업만 마치면 하교. 한 달에 한 번 있는 그 날. 이빨이 아픈지 4일 정도 되던 날. 나는 그 날이 되어서야 치과를 갈 수 있었다. 이빨이 아팠던 그 다음 날. 나는 엄마한테 이빨이 아프다고 말했다. 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학교 빨리 끝나는 날에 다녀 와."


엄마는 매일 내게 물었다.


"이빨은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


그 말에 내 대답은 같았다.


아직 많이 아파.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아팠고, 여전히 욱신거렸다. 참아 보려고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웬만하면 아픔을 참는 성격 탓에 잘 얘기를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얘기하고 싶었다. 아프면 아프다. 얼만큼 아프다. 있는 그대로 내 아픔을 드러내고 싶었다.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얘기하고 다녔다. 친구들에게 아프다고 말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심지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 만큼 커다란 행동이었다.


학교가 빨리 끝나기 하루 전 날. 드디어 내일 치과에 간다는 생각과 왜 나는 아파도 참아야 하는 생각이 충돌하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괜히 서러웠다. 마음대로 아파서도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어디가 불편해요?

- 잇몸이 부은 것 같은데, 며칠 동안 계속 아파요.



의사 선생님은 내 부은 잇몸을 살피시더니 바로 치료를 시작하셨다. 치과에서 항상 들었던 쇠들의 소리로 가득했다. 곧 치료가 끝났다. 그리고 말씀해 주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잇몸도 부어요. 
- 양치 하시면서 칫솔로 살살 마사지 해 주시는 게 좋아요.



나는 아직 잇몸이 얼얼 해서 가사하니다(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나왔다.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 나 치과 끝났어.
- 이제 괜찮아?
응, 스트레스 때문이래.
- 오늘은 학원 쉴까?
아니. 지금 학원으로 가고 있어.
- 그래. 집에 오면 저녁 맛있게 줄게.
응.


전화를 끊었다. 학원을 쉴까, 하는 엄마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어느 곳을 가든 나는 지불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만족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학원을 가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았다. 학원비보다 더 많은 성취감을 얻고 싶었기에. 나는 어디서든 본전을 뽑고 싶었다. 그래서 학원을 가지 않는 날도 학원을 갔다.

학원으로 갔다. 언제나 그랬 듯이 문제를 풀고, 모르는 문제는 여쭤 보았다. 새카만 밤이 되어서야 나는 학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걸어가며 생각했다. 치통은 무던한 사람을 간혹 시험해 보는 용도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때 보건 수업 시간에, 보건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던 게 떠올랐다.



이빨이 아프면 바로 치과로 가야 해.
참고 참다가 치통이 멈추면
다 나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야.
치통이 멈췄다는 것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서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사라진 거야.



치아는 뼈이다. 다른 뼈들은 가죽 안에 숨어 있지만, 치아는 바깥으로 나와 눈에 보여진다. 그 만큼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빨은 무작정 참는, 무던하고 무던한 사람들을 알려주기 위해 치통을 일으키는 것 같다. 참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곪을 대로 곪아 뒤늦게 병원으로 간다 해도 이미 고칠 수 없을 테니.


무던한 사람이었던 나는 아직도 간혹 아픔을 참지만 치통 만큼은 즉각 대처하려고 한다. 가족 중에서도 이빨이 아프다고 하면 당장 치과에 가자고 재촉할 정도로.


하마터면 잇몸이 아프다고 서러워 했던 나를 어리광으로 치부할 뻔 했다. 그때의 내가 그러했던 이유는, 참을 만큼 참다가 더이상 못 참을 것 같았을 때 아프다고 토로했던 서툰 표현이 아니었을까. 다행이었다. 그리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느끼는 나의 신경이 사라지지 않아서. 아직 남아 있어서.


학원에 가서도 나는 선생님들께 얘기했다.



선생님, 저 치과 다녀왔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양치 열심히 해야지.

양치를 잘하지 않아서 받은 아픔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양치를 마사지 하듯이 하기로 다짐하고자 당차게, , 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안 궁금했던 학원에 오기 전 나의 일정. 그 일정을 그날 만큼은 열심히 얘기하고 다녔다.


아픔을 참으면 무던해지는 대신 상처의 골은 깊어지고 깊어지기를 반복한다.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면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에 다다른다. 아픔은 얘기해야 한다. 우리는 아픔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소중하기에. 안 아프길 바라야겠지만, 아파도 괜찮다. 어쩌면 혼자 삭히는 대신 털어 놓으라고 만들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파도 괜찮으니, 털어놔 주길 바라.





당신의 이빨은 안녕한가요?

고통을 감지하는 당신의 신경도 아직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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