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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예정 May 30. 2021

그렇다고 무인도에 놓여지기는 싫어.

그래도 나는 내 두 발이 맞닿은 지금이 좋아.


2학년 2학기를 앞두고 나는 복수전공을 고민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막상 상경 계열의 학과로 신청하고 나니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보다는 내가 국문과 만큼이나 흥미를 갖고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풍덩 빠지고야 말았다.


교양 수업들에서 조별 과제를 하는 동안 여러 번 데인 적이 있던 나는, 조별 과제가 없는 학과를 물색했다. 조별 과제보다는 개인 과제가 더 많다는 학과를 찾았고 그렇게 2학년 1학기에 상경 계열 학과를 복수 전공으로 신청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 줄만 알았다. 여전히 비대면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2학년 2학기 때, 학과 공지를 받았다. 복/부전 신청 기한임을 알리는 공지였다. 이 신청은 학기별로 각각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나는 2학년 2학기까지 내 주전공인 국문과 수업을 전부 마쳐 놓고 3학년 1학기부터는 복수 전공 수업을 들을 계획이었다. 상경 계열로 마음이 굳은 줄 알았는데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상경 계열 수업을 들으면 무엇을 배울 건데?


갑자기 아예 다른 분야가 눈에 들어왔다. 문과생이었던 나에게는 정말 낯선 보건의료 계열. 3학년이 되기 전 복수 전공 신청을 변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고민으로 인해 초조해졌다.


신청 마감 하루 전, 나는 그렇게 복수 전공을 변경했다.



그렇게 복수 전공을 바꾸고 수업을 들으러 나는 학교로 갔다. 그래, 나는 문과생이었다.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 아주 작디작은 먼지 만큼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내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그랗기만 했다.


그래도 괜찮겠지, 몇 번 더 듣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버스를 타고 십 분 남짓한 시간을 그렇게 되새기며 버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몇 주가 흘렀을까. 나는 매 수업을 들으러 가는 버스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나는 무슨 이유로 감히 이 곳에 발을 디뎠을까. 수업을 듣는 이 강의실 속 둥실둥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내가 유일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견디면 괜찮겠지, 점차 괜찮아지겠지. 나의 특기 중 하나는 '버티기'였으니, 낯설더라도 버틴다면 잘 해낼 수 있겠지. 이 생각으로 또 한 주를 꾸역꾸역 보냈다.



못 버티겠어.


더이상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나의 특기 중 하나였던 '버티기'를 잃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언가를 시도했을 때 잘 해내지 못했던 순간들은 있었지만,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지금이 처음이다. 스스로 무던하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무던하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고, 나의 버티기는 비로소 끝임을 자각했다.


나는 버틸 수 없다. 수업을 듣다 보니 점차 실감이 났다. 인문대에서 복전한 학생이라는 걸 아시는 교수님들은 수업 때마다 내게 이해했는지 여부를 물어봐 주셨고, 더는 관심 조차 바스라진 나는 연신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을 보내 드렸다. 좋게 말하면 철부지 딸내미, 나쁘게 말하면 아니, 사실은 이 수업 속 나는 웅덩이였다.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웠고, 멋있었다.


당장 내가 선택했기에 만들어진 순간이었지만, 이로 인해 나는 삐딱해졌고, 왜 나만 이렇게 모르지 하는 생각으로 토라졌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볼 시간은 갖지 않았다. 이미 나는 마음이 떠 버렸기에.




다음 날, 국문과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우리 동네로 놀러 오는 날이었다. 나는 그 전 날 밤 학교에서 오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했다. 무슨 생각으로 전화했는지 기억 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당장 같은 과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어서 당장 생각 났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예정아.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이 들렸다. 향수를 품은 공기 방울이 펑- 터져버렸다. 나는 밤 9시 경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 뭐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내일 친구를 만나는데도 친구의 목소리가 너무나 그리웠다.



학교로 가는 길은 바뀌가 굴러감과 동시에 울렁 파도였다. 멀미를 한 적이 없는데도 멀미를 경험했다. 학교에 가는 걸 좋아했던 나는 한 순간에 학교 가는 길이 두려워진 학생으로 변해버렸다.


드디어 친구를 만났다. 개출구로 나오는 친구를 보자마자 나는 참으려 했던 눈물이 터졌고, 친구는 그런 나를 보면서 웃어 주었다. 해가 떠 있을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친구와 맛있는 밥도 먹고, 예쁜 카페도 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잘 맞는 게 있고, 안 맞는 게 있다는 내 자신감을 깎으며 실감했고, 비로소 인정했다.



나는 무던하지 않아.



무던하다고 착각해서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은 사실, 무던하지 않았고 자신감이 깎이면서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푸하-!


마침내 나는 나의 긴긴 고민을 마무리했다. 나는 나의 복수 전공을 마지막으로 바꾸었고, 내 남은 과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도리야! 언니 결정했어!


울컥할 때마다 도리 옆에 누워서 내 속을 털어 놓았다. 나는 이번에도 이렇게 작고 소중한 존재에게 기대는구나. 도리는 졸린 눈을 마다하고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듯이 나를 보았다.


친해졌던 사람들에게 복수전공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복전생인 나와 친하게 지내 준 따뜻하고 고마운 사람들. 전학 가는 기분이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아쉬웠다. 새로운 과에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이렇게나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어려울 듯하다. 다음 학기에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는 이렇게 친해지지 말아야지, 다짐해버렸기에.


결정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내가 떠올랐고, 그런 나를 반성했다.



나는 생각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씁쓸한 반성이었다. 요즘같은 취업난 속에서 나 자신이 잘 할 수 없는 게 많지 않다고 인식하기란. 나는 몇 번이고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당장 가라앉은 마음으로는 내가 무얼 잘 하고, 내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수영도 못 하고, 나는 아직 자격증 하나 없고 등등. 당장은 내가 부족한 점들만 떠오른다.


친구가 내게 그랬다. 그림도 그렸고, 콘텐츠도 만들었고, 독립출판도 하지 않았냐고. 친구의 말 덕에 내가 무언갈 했음이 떠올랐지만, 내가 졌다는 기분은 여전했다. 맞다. 나는 몇몇 경험을 쌓을 동안 나름 해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기뻐했지만, 지금은 그저 심해다.


기어이 물 위로 떠오른 나의 얄팍한 모습들. 아직 가라앉아 있을 뿐이라고 믿고 싶은 나의 찬란한 모습들. 이제야 인정하게 된 나의 부족함들. 나를 사랑하기로 다짐했던 나는, 또 다시 가라앉는구나.


방금 막 나는 물 위로 올라 왔을 뿐이고, 부족한 수영 실력 탓에 아직 뭍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기다려 주는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들과 나의 어른들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무인도에 떨어지기는 싫다.


힘을 내야지. 아직 가라앉아 있는 나의 찬란함을 위해

부족한 수영이라 할지라도 기어이 나는 다시 숨을 참고,

잠수해서 찾아 봐야지. 나는 다시 긴긴 숨을 참다가 뭍이 고프면 언제든 다시 올라가 보고픈 얼굴들을 마주해야지.


나는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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