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예정 Apr 05. 2020

말로 받은 얻은 상처는, 말로 인해 놓아진다.

다시, 대화.


똑똑, 속상한 일은 의도치 않게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더만, 기분 좋게 나온 아침의 영향이 컸던 탓에 스르륵, 어느샌가 자동문으로 변해 있었다.



딱딱한 말과 무표정에도 웃으면서 그분이 힘드셨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두 번의 방문 후에야 잘못 되었음을 인식했다.



머리가 아파왔고, 깊은 어느 곳에 누군가 뜨거운 물을 들이 부은 기분이 들었다. 호흡을 내쉬면서 열기가 식길 바랐것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다.



나만 참으면 된다.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집에서 화가 나서 손이 떨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 그렇기에 나는 어릴 때부터 참아 왔다. 나만 참으면 조용히 방문했다가, 조용히 나가는 상황이 아주 평범하게 연출되기에. 학창시절부터 그랬다. 무작정 참으려고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나를 칭하는 말이 있었다.



착한 아이


나는 오랫동안 착한 아이로 불렸다. 지금도 그렇다. 그 말이 때로는 나를 가두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내가 나의 화를 참는데에 붙잡아 주는 이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래, 나는 착한 아이니까 참아야지.





하지만 나의 그릇은 스무 살이 되면서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마 나의 그릇의 크기가 그정도밖에 되지 않은 덕이겠지. 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내 그릇이 깨진 것이 덕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깨지지 않았더라면 끊임없이 나는 나 스스로를 속박하면 살았을 테니.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누가 다투는 것을 좋아할까. 다투는 것은 힘들다. 힘이 전부 빠진다. 나의 속상함을 토로하고,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설득하며 이해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기까지는 감정적이 아닌 단어 하나에도 매 순간 생각을 정리하며 나의 말을 전해야 한다. 이 순간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때까지 나의 경험으로는 불가능했다. 상대방의 기분보다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과 나의 말을 감정적보다는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이 너무나 지치고 힘들다. 그럼에도 이 힘든 여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속상함이 나에게만 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같이 있었던 나의 가족게까지 속상함을 선사했다.



나는 갈래길에 섰다. 참을까, 얘기를 해야 할까. 나는 이전에도 이런 고민을 오래했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시간이 났던 딸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신다면서 시간이 피어있는 손으로 인터넷에 검색하신 후 흔히 말하는 맛집을 찾아내셨다. 그리고 어느 말을 들었다. 훗날에는 그 말이 오해였음을 풀었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엄마가 나를 위해 고민했던 시간을 무시하는 말로 들릴 만큼.



계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고민했다. 참으려고 했으나, 속상함이 가시지 않아서 오래도록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작년 전공 수업 때 교수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참지 마세요.


그 말을 들었던 그때 나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선명히 기억난다. 처음에는 용암이 조용히 내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암으로 인해 나는 감정적으로 말을 전할 뻔했지만, 이성적으로 전할 말을 정리하려 애썼다. 구어체로 전하기에는 조금 긴 말이었기에 여러본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 나의 속상함을 전했다.



수업을 마치고 동네의 한 커피 점에 있을 때, 답장이 와 있었다. 넘쳐 흘렀던 나의 속상함을 딱 넘치지 않을 만큼만 다듬어 보았지만, 그럼에도 해구처럼 깊지고야 말았다. 이런 나의 감정에 부정할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나의 해구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가라앉아 있었던 나를 건져 주었던 답변을 받았다.



단지 그 순간, 그곳과 나의 온도가 맞지 않던 탓이었다. 사람의 탓이기 보다는, 그 순간 탓이었다. 속상했던 나를 기억해 주시고 이해해 주셨다. 그렇게 오해를 풀었다. 오히려 괜한 해구를 드린 것만 같아서 죄송했다.



당시 나는 엄마에게 이 상황을 전했다. 엄마가 내게 그랬다.



그렇게 오래 고민하면서
너만 힘들어 하기보다는
참지 말고 말해.



엄마는 나를 믿고 있었다. 그리 쉽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내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계셨다. 참고, 또 참았다가 더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을 때 그제야 목소리를 내어 보는 나를 알고 계셨기에.



다시, 최근에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또 한번 고민했다. 그리고 이를 우선으로 세웠다. 나만 상처 받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상세히 부사들을 제하고 객관적으로, 간결체로 그때의 상황을 전한 후에 나의 생각을 말했다. 원인를 제공한 인물이 아닌, 다른 분께서 나를 토닥여 주셨다.



아이러니했다. 나는, 말로 상처 받았다. 하지만, 또다시 말로 인해 아물었다. 상처 받은 수단과 위로 받은 수단이 같았다. 아주 조금 씁쓸했다. 어쩌면 종잇작보다도 얇디 얇은 한 끗 차이로 이렇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다니.




나의 말은 부디

밝은 수단이기를

늘 기억하고 기억해야지.


나 역시 상처 받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도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해야할 말을 전하되,

사과의 말과 따뜻한 말을

함께 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온화할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다고 무인도에 놓여지기는 싫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