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관상

지하철에 대한 고찰로 써 나간.

by 그냥예정


지하철 환승을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면 늘 만나는 문구가 있다.





여기는 빨리 가는 길이 아닙니다.



빨리 가는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멈춰 있는 계단을 오르듯이 걸음을 재촉한다. 암묵적인 의미로 사람들은 그 에스컬레이터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손잡이를 꼭 잡으세요.



일정한 간격으로 쓰여 있는 문구가 무색하게도 손잡이를 잡는 사람은 몇 없다. 다들 움직이는 무빙워크 위를 걷기 바쁘다.



모든 승객이 내린 후에 탑승하세요.



지하철 안전문에 선명하게 쓰여 있는 문구가 무안해질 정도로 우리는 하차하는 동안 함께 탑승한다.



내려야 할 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문 앞자리를 지키는 사람, 입을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기침을 내뱉는 사람, 다리를 쩍 벌리고 않는 사람,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굳이 핀잔을 늘어놓는 어르신들. 이외에도 지하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집합소인 지하철은 어쩌면 무질서의 집합체가 아닐까, 싶다. 그 고찰을 지금 이곳에 써 내려간다.






내릴게요!



급행열차에 올라타면 자주 들을 수 있는 외침. 띄엄띄엄 정차하는 급행열차에서 하차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전진해야 하며,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많이 내리지 않는 역이라면 더더욱.


등 뒤로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는 벌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부천역에 다다르자 한 벌이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을 최대한 구기고 구겨서 독침으로 무장한 수많은 벌들의 틈을 뚫어야 했다. 모두 자신들의 침에 독을 가득 발라 놓은 상태라 빠르고 정확하게 이탈을 성공해야 했다. 내릴게요, 내릴게요. 발걸음이 닿는 데로 자신의 행동을 외침으로 알렸다. 독이 잔뜩 오른 벌들의 집단은 그 한 벌을 위해 굳이 흐트러지려 하지 않았다. 모두 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그 벌은 혼자만의 벅찬 발걸음으로 집단 속을 헤집어야 했다. 독이 오른 벌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비판이 난무했다. 비로소 이탈에 성공한 벌은 사람이 되어 바깥공기를 마셨다. 똑같은 내부였지만 확연히 다른 공기임을 느꼈다.



여전히 벌들의 집단은 굳건했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어이 벌이 되고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벌들은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더 힘을 주었다. 새로운 벌들이 들어온다. 벌들 간의 간격은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촘촘해졌다. 들숨 날숨을 반복할 때 풍겨지는 자그마한 향기로 아침 식사 메뉴도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오늘 아침 김치찌개를 드셨구나. 몸을 조금 틀었다. 이번에는 연신 기침을 하시는 분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 키가 작아서 머리 위에서만 바람이 느껴졌다. 또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화장을 하시는 분이다. 파운데이션 가루의 냄새가 올라온다. 또 몸을 틀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새로운 벌들은 강했다.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면초가로 몸이 조여왔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열차 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두어 번 정도 반복했을 때, 이 속에서 유일하게 벌로 변신하지 않은 사람,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차 문 닫겠습니다.
고객님, 가방에 걸려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뒤로 가세요.



스피커 너머로 기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한숨이 들렸다. 문 앞에서 가방을 메고 있던 벌들은 몸을 더 구겨 넣었다. 드디어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열차의 반동에 따라 벌들은 같은 방향으로 휩쓸리고 되살아났다. 웃긴 광경이었다. 그 웃긴 광경을 여왕벌은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기계를 든 채로. 자리에 앉은 사람. 그 사람들이 곧 이곳에서의 여왕벌이었다. 평범한 벌들은 여왕벌 앞을 굳건히 지켰다. 그 바로 앞에 있는 혹여나 앉아 계시는 여왕벌과 닿을까 봐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여왕벌을 지켜냈다. 그 정성에 갸륵하면, 때에 따라 하차하기 전에 일어나셔서 앉을자리를 하사해 주신다. 성격이 무뚝뚝한 여왕벌이라면 역에 정차 후 문이 열렸을 때 내려 주신다. 여왕벌은 자리를 남김으로써 또 다른 여왕벌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벌로 변한 이 지하철 속에서는 자리에 앉은 자가 곧 여왕벌이다.



그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는 데에도 지하철에서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되도록 그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에게 주어질 것. 간혹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줄에 서 있던 벌이 자신의 민첩성을 이용하는 다른 줄의 자리를 빼앗은 경우. 안에서 뜨거운 것이 들끓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뭐라 하지 못한다. 어쨌든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이기 때문. 그렇게 매우 쉬우면서도 어렵게 여왕벌 계승이 완료되었다.



지하철을 타고난 후로 가장 큰 힘이 되는 말은,

“가예야, 앉아서 가!”

앉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된 후로 저 말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너무나 고마운 응원이기도 했다.



미숙이가 그랬대? 세상에.



통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재미난 일이길래. 그 미숙이라는 분이 무슨 일을 하셨길래 저리도 놀랄까. 왜 미숙이 그분은 그 일을 하셔서 저분의 목소리를 커지게 만들까. 저녁 시간대 수인선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터라 아주머니의 큰 목소리가 이 커다란 공간을 푸짐하게 메웠다. 사람이 많든 적든 큰 통화 소리는 늘 귀에 거슬린다. 통화하시는 분의 목소리가 큰 것인가, 아님 내 청력이 월등한 것인가. ‘다른 고객들을 위해 통화 소리는 작게 해 주세요.’ 지하철 안내 방송이 야속할 따름이다.



이건 세상에서 제일 비싼 단독 공연.

폰서트 - 10cm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이도행 열차를 탔다. 다행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 옆에 이어폰을 꽂으신 분이 앉으셨다. 종점까지 남은 한 시간 동안 앉아서 갈 수 있어서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옆에 계신 분의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위 문구가 그 노래의 한 구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어폰을 뚫고 나오는 큰 노랫소리에 화를 삭였을 텐데, 이 날은 나도 그 노래를 함께 들었다. 가사도 어쩜 저리 좋은지. 저 한 구절을 외워서 검색했다. 10cm의 ‘폰서트’라는 노래. 의자에 앉아서 그런가, 기분이 좋았다. 의자에 한 번 앉았다고 타인의 비매너를 즐길 만큼 사람이 이리 너그러워진다니. 어쩔 수 없다. 지하철을 앉아서 간다는 것은 단언컨대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자신할 수 있다. 집에 온 나는 저 노래를 내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했다.



거참 다리 좀…….



사람들에 둘러 쌓여 간신히 두 다리로 버티고 있을 때 제일 부러운 사람은 단언컨대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 간혹 그 사람이 미워질 때도 있다. 굳이 다리를 쩍 벌리고 있을 때. 쩍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내 두 다리를 지탱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사람의 오른편 다리를 밀어 강제로 오므라지게 했다. 그 사람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지만 나에게는 일말의 멍한 순간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초점 없는 눈으로 그 사람의 시선에 대응하고 있었다. 한 정거장 더 가서 그분은 내리셨다. 그 덕에 나는 앉았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사람 많은 곳인 만큼 조금의 틈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에 필요 이상으로 쩍 벌린 다리만큼의 공간은 더더욱 사라져야 했다.



우측 보행.



지하철에는 보편화된 규칙이 있다. 우측 보행.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계단에서도, 복도에서도. 우측 보행을 권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는, 우측에 서고 좌측은 급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놓아야 했다. 다양한 규칙들 중에서도 지금은 에스컬레이터를 살펴보려 한다. 환승을 위해 지하철에서 내리면 계단과 무빙워크를 만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무빙워크를 택한다. 심지어 그 위를 걸으며 올라간다. 안전에 유의해야 할 이곳에서도 우리 한국인의 급한 성격이 드러난다. 대개는 좌측을 비워둠으로써 급한 사람들을 배려하지만, 내가 환승하려 할 때 만나는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방향이 사라지고 모두 좌측이 된다. 모두 급한 사람이 되어 움직이는 계단 위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간다. 이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비매너인이 되는 순간이다. 규칙을 지키며 배려한답시고 우측에 가만히 서 있노라면 오히려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오히려 지하철에서 더 대중화된 규칙은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다. 모두가 급하면 함께 급해져야 한다. 그래야 지하철에서 괜히 상처 받지 않고 무사히 도착지까지 갈 수 있다.



네, 이거요.



이번에도 오셨다. 지하철 내부에서 물건을 소개하고 판매하시는 분. 이 열차에서는 항상 저 분만 보이셨는데, 늘 저 멘트와 함께 등장하신다. 손에는 지폐들이 가지런히 쥐어 있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피었다. 항상 이 분만 오시는 것으로 보아, 아마 판매왕 엘리트이신 듯했다.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 중 하나이다. 설명을 어찌나 잘 하시는지, 나도 혹 할 뻔했다. 꽤 많은 분들이 이 분이 설명하시는 물건을 구매하신다.



흐름.

지하철은 흐름이다. 규칙이 버젓이 존재하더라도 흐름에 따라 유연해져야 한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위한 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 지하철이 아닐까 싶다. 흐름에 따른 유연한 태도 변화를 배울 수 있기에.



오늘도 지하철에서 잔뜩 눈치 보고,

스트레스받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오늘 출근길도, 퇴근길도

부디 앉아서 가시길.



모두 앉아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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