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평가하기 위한 기초 운동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 후보 간 TV 토론 진행 여부가 드디어 결정되었다. 설 연휴 기간인 오는 3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먼저 양자토론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설 연휴 직후인 2월 3일에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까지 참여하는 4자 토론을 진행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후보자의 비전과 정책의 논의 대신 네거티브 공방이 많은 데다가 유권자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TV 토론도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점이 오히려 다가올 토론에 관심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탄핵 정국에서 빠르게 진행됐던 지난 19대 대선에도 총 6번의 후보자 간 토론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토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한국에는 토론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어, 왜 방송에 나오는 정치인의 토론 수준이 그렇게 낮은지 모르겠어, 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성숙한 토론 문화를 만드는 일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그들만의 책임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토론을 보는 사람의 안목과 수준이다. 일반인도 누가 어떠한 이유로 토론에서 더 설득력 있는지 큰 틀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야 성숙한 토론 문화를 만들 수 있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그것을 수용하는 국민의 수준에 비례한다는 말처럼 토론 문화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보는 소비자가 없으면 좋은 음악이 계속 나오기 힘든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토론을 평가하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토론이라고 하면 뭔가 어렵기만 한 것 같고, 토론을 봐도 일종의 느낌이나 인상만 남아 토론을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어떻게 토론을 평가해야겠다는 기준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토론이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정작 토론을 잘하는 방법에만 초점을 맞출 뿐 토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인 건 토론을 평가하는 일은 생각만큼 복잡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초적인 세 가지 평가 기준을 염두에 두고 토론을 보면 구조적으로 토론을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토론을 평가하는 기준을 살펴보기 전에 토론에서 상대적으로 더 잘했다, 즉 토론에서 승리했다, 는 의미를 짚어보고 갈 필요가 있다.
토론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토론 논제에 대해 각 측이 증명해야 하는 책임에 따라 더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청중이 해당 토론자 또는 팀에게 설득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토론을 벌이는 상대방이 아니라 청중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특정 토론자가 청중을 설득시켰다는 것은 논리, 공감력, 신뢰와 권위를 통해서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나에게 투표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론을 평가할 때는 이러한 설득 요소를 ‘평균적인 수준의 이성과 지식을 갖춘 유권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어느 팀이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평균적인 수준의 이성과 지식을 갖춘 유권자’의 관점은 자신의 주관과 선입견을 토론에 투영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국제 토론대회에서 자주 쓰이지만 여러 토론에 접근하는 데도 꼭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토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이 아닌 토론에서 토론자가 발언한 내용에 기반하여 토론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수준의 이성과 지식을 갖춘 유권자’의 기준은 어떻게 정할까?
나라마다, 문화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통용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의무교육을 마치거나 고등학교 2~3학년의 평균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
2) 전문가가 아니며 전공지식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
3) 해당 주제에 대해 편견이 없으며 사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가정
이렇게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야 우리가 특정 주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답을 정해놓고 토론을 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 토론자의 발언을 듣기도 전에 “저건 무조건 안 될 거야”, “나는 저 사안에 무조건 반대야”라고 하는 태도에서 멀어질 수 있다. 우리 모두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토론을 평가할 때 많은 분들이 내가 그 사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내가 믿거나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내용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토론을 일종의 지식 경연으로 보는 닫힌 사고방식이다.
토론을 평가할 때 이러한 지식수준, 정보의 획득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론자의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
토론자 발언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된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
논리의 가정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불분명한 근거, 데이터, 출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능력이다.
이처럼 토론에 접근하는 자세와 태도는 토론의 결과를 종합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데 정말 중요하다. 물론 사람의 특성상 경험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안에 100% 객관적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내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수 있겠구나, 내가 알거나 믿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겠구나, 라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장치가 토론을 편협하게 보지 않고 더 넓은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