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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어버드 Apr 15. 2023

학벌사회 vs 학력사회

“입시경쟁 성적비관 투신자살 부정입학 특례입학 학력위조 학벌세탁”


안타깝지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단어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자라면 분명 하나 둘 겪었을 법한 일들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몇 가지가 해당된다. 노량진과 신림동을 오가며 세 번의 수능시험과 세 번의 임용고시로 치열한 입시경쟁을 겪었고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대학졸업을 하고 반사회인 신분으로 고시공부를 하던 중에도 성적비관은 늘 겪던 일이었다. 그리고 최종학력을 올리겠다고 해외대학원으로 학벌세탁을 했다. 물론 어느 만큼 힘들게 공부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하기 쉽다고 비난과 힐난을 일삼고 사회적 루저취급을 할 뿐이다.


탈조선을 감행하고 어언 11년이 지났다. 학벌보다 전공을 따지고 명문대 진학 경쟁률이 예전 같지 않으며 공무원 시험 경쟁률도 약화되고 스타트업 청년창업이 늘고 있어 학벌사회가 곧 무너진다고 소리 높여 떠들고 있는 지금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람 잡는 학벌사회가 무너지겠냐’, ‘취업이 안되니까 창업을 했네’, ‘카이스트 나와서 중소기업 다니네’, ‘적정취업도 아니고 하향취업을 할 거면 명문대는 뭐 하러 갔냐’, ‘지방대 꿀리니까 대학원으로 학벌세탁했네’, 등등 끊임없는 입방아질의 연속이다.


학벌사회 신화를 이루고자 대학간판을 그렇게 따지다가 결국 고학력 인플레이션으로 대졸자 실업률이 늘고 수출경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더딘 경제성장으로 실질임금은 오르지 않고 대기업은 일자리 창출은 커녕 비정규직을 늘리는 실정이다. 중소기업은 여기저기 인력난을 호소하는데 명문대 타이틀을 가지고 하향취업을 하면 상향이직이 불가능해 장기구직을 하겠다는 대졸자는 넘쳐나고 그런 고학력자를 받아줄 일자리는 현저히 부족한 수급불균형이라는 총체적 난국이 된 우리 사회다. 결국 개인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간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으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요즘은 4차 산업혁명으로 플랫폼사회가 되면서 각기 다른 형태의 플랫폼에 좋은 서비스나컨텐츠를 제공하는 크리에이터들이 돈을 벌고 있다. 심지어 플랫폼사업을 이끄는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기업들이 국가를 인수하고 정보를 통제할 것이라는 두려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이용하는 차량서비스 플랫폼 우버, 숙박서비스 플랫폼 에어비앤비, 음식배달서비스 플랫폼 우버이츠(호주는 메뉴로그) 등 사실상 학벌이 무용지물인 신세계이다. 학벌보다는 자본과 창의력이 관건인 시장이다. 그래서 자본이 없고 주입식 교육으로 명문대를 졸업해 창의력이 몰살된 고학력자들은 선뜻 플랫폼사업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다. 경쟁을 해서 도태될 확률이 크기에 그저 두렵다.


반면 내가 적을 두고 사는 호주사회는 학벌(school tie)이 아닌 학력(educational background) 중심의 직업기반 사회이다.



‘학벌’을 호주에선 ‘school tie’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교복과 함께 목에 메고 다니는 ‘학교 넥타이’를 뜻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호주는 학벌을 얘기할 때 old school tie (종종 old boys tie)라는 표현을 쓴다. 엘리트 명문학교 졸업생들만의 표식이자 자부심의 상징으로 출신학교 색과 문장이 그려진 넥타이를 맨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을 나누는데서 붙여진 비유적 표현이다. 그래서 호주사회에서 해당 출신학교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뜻은 대개 ‘똑똑하다(smart)’ 혹은 ‘높은 수준이다(high standards)’라는 뜻으로 사회적 계급(social classes)을 나타낸다. 그런데 단어에서도 쉽게 느껴지듯이 학벌을 뜻하는 ‘old school tie’는 그야말로 늙어빠진 올드스쿨타이, 즉 오래되고 낡은 학교 넥타이라는 뜻의 고리타분한 개념이다. 요즘 호주사회에서 듣기 힘든 단어 중 하나이다.


호주사회에서 학력은 우리 사회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학력의 개념과 성질이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의 학력은 ‘academic background (학문적 학업배경)’에 가깝고 호주사회에서의 학력은 교육배경이라는 뜻의 ‘educational background (직업적 학업배경)’에 훨씬 가깝다. 그래서 호주에서 일을 구해본 자라면 이력서 학력칸에 적힌 ‘educational background’가 익숙하며 면접관의 ‘What is your educational background? (교육배경이 어떻게 되십니까?)’라는 질문이 낯설지가 않다.


무슨 말이냐면 호주사회에서 일컫는 학력, 즉 educational background는 출신학교도 학교지만 대개 전문 기술이나 직업에 해당하는 모든 자격증, 수료증, 이수증 (certificate/diploma) 등의 실습을 포함한 직업훈련 교육배경을 뜻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했던 직업 경력을 포함한다. 그래서 호주사람들은 학력을 얘기하면 학문적 학업능력(academic background)이 아닌 직업적 학업능력(educational background)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학력을 이야기할 때에는 가장 최근에 수료한 현재 종사하는 직군 관련 교육증서, 훈련 및 실습 이수증, 직업 순으로 물어보고 대답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명문 엘리트 대학을 나온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현재 내가 밥 벌어먹고사는 직업이 중요한 학력이 되는 사회이다. 우리식의 학력, 즉 academic background라고 하는 학문적 학업능력은 호주에서 석박사 연구를 마치고 학계에 몸을 담아 그야말로 연구 관련 주제에 맞는 교수나 전임강사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개념이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삼수를 두 번씩이나 한 나의 이력에 호주 면접관들이 의아해했다. 젊은 나이에 무능하지 않고서야 6년 가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것이었다. 먹고사는 것을 일도 안 하고 어떻게 해결했냐고 묻길래 고시공부하는동안 부모님께서 주신 용돈으로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말도 끝나기 전에 눈들이 커졌고 오 마이 갓을 외치는 분도 계셨다. 결국 나는 문화적인 차이라고 거듭 면접관에게 설명을 드렸다. 그때 느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전혀 글로벌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치열하게 입시경쟁을 뚫고 달려왔는데 억화심정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호주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직업훈련을 감내했으며 서서히 발맞춰 나갔다.

참고로 호주의 정규 학교과정은 다음과 같다.

12년이라는 1,2차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호주에선 본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3차 교육을 받는데 그 체계는 다음과 같이 짜여 있다. 단계별로 자격 1급에서 박사로 갈수록 어렵고 복잡한 이론 및 훈련교육이 이루어진다. (출처: aqf.edu.au)


호주사회에서의 3차 교육은 대개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과 관련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실습위주의 직업훈련 교육으로 그 과정은 3개월부터 3년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폴리텍대학에 해당하는 TAFE (Technical And Further Education)라고 불리우는 주정부 관할 교육소에서 대부분의 3차교육이 이루어진다. 사실 호주학생들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공부만 하는 경우는 드물고 파트타임으로 조금씩 과정을 이수하며 직업훈련교육을 받기 때문에 실질적인 훈련이수기간은 개인차가 있다. 그래서 정해진 교육과정 이수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학기를 연장하거나 휴학처럼 학기를 중간에 휴지 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무엇보다 한번 이수한 자격증 혹은 수료증은 주기적으로 교육을 받고 갱신을 해야 현직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다. 오래된 자격증이나 수료증으로 직장에서 일을 하려면 재교육(CPD: Continuing Professional Development)을 꼭 받아야 하는 게 원칙이다.


이 외에 호주에서 흔히 말하는 라이센스는 학위개념이 아니라 운전면허증처럼 Licence, 그야말로 면허증이자 허가증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소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공인중개사에 준하는) 호주 주정부 면허인 Property Licence 또한 운전면허시험처럼 단기간 공부를 해서 시험을 통과하면 되는 면허공부이다. 학위라고 하기에는 공부깊이가 얕고 철저히 직업을 위한 면허증 공부이다.


사실 나는 호주 명문대 시드니대학 교육대학원 출신이다. 학벌세탁이다. 미국에 아이비리그가 있고 영국에 옥스브리지가 있다면 호주에는 Group of Eight (Go8)이 있다. 지에잇이라고도 불리는 총 8개의 호주명문대학 리스트인데 사실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관심도 없고 Go8이 뭔지 잘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대학진학률이 70프로가 넘는 우리나라와 달리 호주고딩들은 20프로 내외의 학구파 범생이들만 대학에 가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총 43개의 호주 종합대학들은 서너 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공립대학으로 주정부에서 관할하는데 대부분 연구중심(research-based)의 학부구성으로 대학 간의 빈부격차가 거의 없다. 99년도에 호주 수도 캔버라에서 비영리단체 Go8이라고 하는 명문대 리그를 만든 이유도 사실 호주 학문 연구의 70프로가 Group of Eight대학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Go8대학에서 공부를 하려면 학부생이더라도 해당 전공과목의 연구 주제와 목적을 정확히 해야 한다. 생각보다 연구 수준이 높고 만만치 않다.


특히 세계대학순위 50위권을 놓치지 않는 호주 멜번대와 시드니대는 연구실적과 성과로 용호상박이다. 그러나 최근 멜번대가 전 세계 대학순위에서 앞서나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졸업한 시드니대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이나 요즘 해리포터대학이라고 불리면서 캠퍼스 투어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소문이다. 특히 주말이면 중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투어버스로 학교 본관이 사진촬영 명소가 된다고 들었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서호주 교육청에 교사등록 승인이 나고 난민촌 일을 하기까지 시드니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는 거다. 호주 내 어떤 대학이든 그저 교육대학학위가 필요했다. 굳이 어려운 공부를 돈 주고 하려고 명문대 가느니 어차피 다 공립대학들이고 호주에서 취업을 하고 살 거라면 학업량이 적정 수준인 호주 내 어느 교육대학을 나오더라도 무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가족들, 친구들, 친척들만 시드니대학 졸업장을 좋아할 뿐 호주친구들과 지인들은 나의 부족한 직업적 학업능력을 걱정할 뿐이었다. 서호주 난민촌 일을 할 때도 ‘너 시드니대학 나왔다고? 학구파네! (Are you from USYD? Must be academic!)’ 정도의 말을 들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나의 일관된 업무성과에 비례한 칭찬이 오갈 뿐 되려 일을 못하면 너무 학구적이어서 일머리가 없는 거 아니냐며 빈정댔다. 책만 알고 세상물정 모르는 너드(nerd) 취급을 받았고 꽤 자주 ‘You smart-ass~!(수재라고 우쭐거리는 자식!)’라고 비아냥거리며 놀리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선 공부만 잘하면 성공한다고, 명문대 나오면 고속도로 달리는 거라고, 그리고 학력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그렇게 공부! 공부! 공부! 소리를 들으며 컸고 치열하게 입시경쟁을 겪었다. 그런데 호주에선 공부만 할 줄 아는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었고 6년씩이나 부모님한테서 돈타 쓰며 공부만 한 직업적 학업능력(educational background)이 제로인 무능력자 취급을 받았다.


학계에 남았더라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정답은 NO!이다. 왜냐하면 호주사회는 박사, 교수, 전임강사, 혹은 조교 등등 학계 관련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순간 학구적이고 상식적이지 못한 그룹이라는 school tie를 묶는다. 7,80프로 이상의 호주 국민 대다수가 12학년만 마치고 나면 직업전선에서 훈련과 실습(대개’apprenticeship:수습직’으로 시작)을 통해 성장을 한다. 그래서 호주사회의 20프로도 안 되는 소수의 학구파 석, 박사들의 삶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인간적인 유대를 가지고 공감할 수가 없다. 기름때 흙먼지 피땀에 쪄들어보지 않은 자들이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알겠냐는 태도이다. 반대로 상아탑에 젖어사는 호주 국민 소수의 아카데믹 그룹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더 깊이 있고 심도 있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엄청난 성과와 명성을 쌓는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밀도 높고 농도 깊은 호주의 상아탑 문화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대학을 다 들어간다. 그리고 졸업해 취업이 안되면 사회적 신분유지를 위해 대학원을 간다. 심지어 정신이 돈 사람마냥 돈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돈박사’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상아탑 문화가 지닌 밀도와 농도가 상대적으로 옅어 보인다. 진심으로 대학교육과 연구의 질을 점검해봐야 한다. 작디작은 대한민국 땅에 호주 인구의 두 배정도가 사는데 대학 개수는 300개가 넘는다. 통폐합이다 뭐다 대학 개수를 줄인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도돌이표다.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화가 퇴색하고 “입시경쟁 성적비관 투신자살 부정입학 특례입학 학력위조 학벌세탁”과 같은 헤드라인이 사라지고 학문적 학업배경이 아닌 직업적 학업배경을 묻고 답하는 그런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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