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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어버드 May 27. 2023

불편한 의료시스템

탈조선 기회비용 1.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고 했던가. 탈조선을 하고 정착한 곳이 찬란한 빛으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 되려 그 빛이 밝을수록 어둠은 더 짙은 법이다. 탈조선을 감행하고 내가 정착한 호주라는 곳은 건강한 복지국답게 직업, 교육, 출산, 육아, 연금, 다문화, 노인요양 등 사회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부분에 걸쳐 찬란한 빛을 비추어 주는 곳이다. 그런데 그 빛이 찬란한 만큼 어둠 또한 칠흑같이 검은 게 호주사회다. 


그중 단연 으뜸은 불편한 의료시스템이다. 해외에 적을 두고 사는 탈조선러들은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나 역시 호주 사회에 묻혀 산지 12년, 고군분투한 만큼 긍정적인 탈조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는 불편함을 꼽으라면 느려터지고 불편한 의료시스템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진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환자가 병을 키우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기까지의 소요시간이 가장 짧은 시스템, 최첨단 의료디지털화로 숙련된 수술과 시술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시스템, 거기다 한방의료 시스템까지 합친다면 정말이지 최고다. 탄탄한 의료서비스로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챙겨주니 웬만해선 근로능력을 상실할 수가 없는 구조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비싼 치료비 및 수술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좋은 의료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희귀병이나 난치병이 아닌 이상 미리 들어둔 보험으로 수술비를 대체하고 수월하게 회복을 한다. 


반면 호주의 공공 의료시스템(Medicare)은 그렇지 못하다. 연방 의료 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는 호주 국민의 과세대상 소득(taxable income)의 2프로라는 조세율을 가지고 운영하기에 호주 국민 모두에게 무료(No cost) 혹은 저비용(low cost)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국민이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시스템이 짜여 있다. 즉, 트리아지(Triage: 치료 우선순위를 위한 환자 분류 작업)를 통해 증상 및 병상이 위급한 환자가 진료 및 치료 우선순위가 되어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구성된 의료체계이다. 호주 전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되 심하게 아픈 사람일수록 먼저 치료 및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구성한 보편적 복지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호주의 공공의료가 마음에 들어 이민을 결정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은 K-의료를 경험해보지 못한 유럽, 남미, 동남아, 중동 등지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호주병원 응급실만 가보아도 알 수 있다. 대형사고로 심각한 외상을 입은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 환자분류를 담당하는 간호사인 Triage Nurse(초진간호사)를 통해 증상을 호소하고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진료대기를 해야 한다. 응급실에 왔다고 우리나라처럼 바로 진료와 치료가 시작되지 않는다. 나보다 더 위급한 증상을 가진 환자가 먼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호주병원 응급실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환자들이 소리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 상황이 왕왕 있다. 물론 병원 보안요원(Security)이 나타나 제지를 한다. 


내 몸이 병들고 아픈데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의 치료우선을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며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심정… 우울하다. 


그런데 또 기다리다 보면 내 차례가 되어 비싼 치료와 수술을 무료로 받게 된다. 다행이다. 그렇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 잘 회복이 되면 다행인데 호주의료체계 구조상 우리식의 수술회복 및 몸조리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병상을 일주일씩 차지하고 입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 하루나 사흘, 정말 암수술처럼 중병인 경우 일주일 정도 병원 입원을 할 수 있다. 아직 수술을 못 받고 몸이 아픈 채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에 대한 배려로 최대한의 의료복지를 서로 공유하기 위한 퇴원절차이다. 즉 환자는 최소한의 필요기간만 입원을 하고 곧장 퇴원을 해야 한다. 애 낳고 다음날 집에 갔다는 호주엄마들 말이 과장이 아니다. 


사실 호주사람들은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하루빨리 병원을 벗어나 편안한 자기 집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 입원을 하게 되면 병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반면 한국인에게는 회복이 완전히 될 때까지 전문병원에서 케어를 받는 게 당연하고 익숙한 절차라 제왕절개 출산 후 3일 만에 퇴원을 시키면 문전박대당하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타지에서 서럽다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호주의 메디케어(Medicare)는 연방국가차원의 의료복지이기에 무료로 수술을 받고 나면 회복과 몸조리는 개인의 책무로 집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홈케어가 힘든 경우 해당 지역의 비영리단체나 군∙경찰 협회 등지에 문의를 해 Care Plan(돌봄 플랜)과 같은 몸조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패키지나 프로그램들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보편적 의료복지 혜택이 일상인 호주사람들은 약국매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over the counter medicine(의사 처방전 없이 구입가능한 약)”에 길들여져 있다. 아이들 감기도 웬만해선 자가치유를 하는 게 다반사다. 그래서 호주사람들이 아프다고 전문의(Specialist)를 찾아가거나 병원(Hospital)에 간다고 하면 좀 심하게 아픈 경우다. 그리고 전문의 진찰 및 상담비용은 100불에서 300불 사이로 우선 자가부담을 한 뒤, 지불비용의 30프로에서 50프로가량을 메디케어로부터 환급받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감기가 걸리거나 염증이 생기면 동네 내과 혹은 가정의학과나 이비인후과 전문의에게 바로 가서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을 수 있다. 그것도 몇백 불이 아닌 몇천 원에서 몇만 원의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그날 바로 약이나 주사를 맞고 쉴 수 있다. 그래서 아픈 병의 호전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심지어 영양제까지 그날 맞을 수 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우리식의 영양제라고 하는 IV(Intravenous drip)는 정말 병원에 입원했을 때만 맞을 수 있다. 항생제 주사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독감이라고 무조건 투여하지 않는다. 웬만한 감기나 염증은 경구투여 항생제가 일반적인 치료방법이다. 그래서 감기가 낫거나 염증이 낫는 속도가 참 더디다. 대신 좋은 점은 약에 대한 내성(tolerance)이 잘 안 생겨 조금만 센 약을 먹어도 금방 약발이 받는다. 

  

탈조선을 하고 내가 정착한 호주에서는 기본적으로 감기나 감염으로 몸이 아프면 General Practice(GP: 대개 우리의 가정의학과 의사 선생님에 해당하는 주치의가 운영하는 소규모 클리닉)를 찾아간다. 그리고 GP(주치의: General Practitioner) 선생님께서 필요한 약을 처방해 주거나 추가 검사(엑스레이, 피검사, CT스캔 등)가 필요한 경우 검사지를 작성해 준다. 그러면 검사지를 들고 해당 검사장(방사선 센터, 병리과 센터 등)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검사결과는 자동으로 담당주치의 클리닉으로 보내진다.) 다시 주치의선생님을 찾아가 증상에 대해 의논하고 처방을 받는다. 그리고 만약 증상이 심각하면 해당 전문의(Specialist)를 찾아갈 수 있게 소견서(Referral)를 써준다. 그러면 소견서를 들고 해당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검사, 치료, 수술을 논의한다. 전문의 선생님과의 상담 및 논의결과는 역시 해당 주치의 클리닉으로 간략하게 자동보고가 된다. 


복잡하지만 나를 담당하는 주치의(GP) 선생님이 나의 병력(medical history)을 한 곳에서 관리해 주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병의 추적관찰이 용이한 장점이 있긴 하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이 병원 저 병원에 나의 병력이 흩뿌려져 언제 무슨 진료와 처방을 어떻게 받았는지 그 기록을 알 수 없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내가 갔던 병원을 몇 년 만에 찾아가 과거 병력 진단서를 받으려 해도 오래된 기록은 동네병원에서 보관하지 않고 있는 경우도 꽤 많다. 호주에서는 GP시스템이라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 계신 클리닉에 연락을 하면 내가 앓았거나 현재 앓고 있는 병력에 대한 모든 진료와 치료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호주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족주치의(Family Doctor)를 가지고 있다. 할머니, 아빠, 삼촌, 엄마, 동생 등등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 GP에게 진찰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가족주치의든 개인주치의든 호주의 주치의 시스템(GP system)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몸이 아프면 한 시간 아니 적어도 하루 안에 ‘내 병이 무슨 병이다’라고 진단이 내려져 약이든 주사든 수술이든 빨리 치료받고 완쾌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지만 빠른 쾌유가 불가능한 호주사회다. 어두운 면이다.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 받은 검사지에 적힌 장소를 찾아가거나 전화예약을 하는데, 당일 검사예약도 안돼 삼사일 혹은 일주일 뒤로 잡힐 때가 다반사고 종종 더 위급한 환자의 검사우선권으로 잡혔던 검사예약일이 몇 시간 뒤 혹은 며칠 뒤로 미루어지기도 한다. 물론 해당 접수처 직원이 연락이 온다. 


MRI, CT촬영, 피검사, 소변검사 등등 하나씩 하나씩 차례차례 뫼비우스의 띠처럼 각기 다른 검사센터에서 예약하고 기다리고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관련검사 해당센터에 검사예약을 하고 검사지침을 전달받고 잘 지켜서 정해진 예약날짜에 방문해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려야 약이든 주사든 그다음 치료가 주치의 선생님과 함께 이루어진다. 물론 검사결과가 나오고 주치의 선생님을 만날 때까지는 진통제로 버텨야 한다. 정말 진 빠진다. 하루에 몰아서 다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소견서를 받고 찾아가야 하는 전문의 선생님 진료예약은 더 힘들다. 대개의 전문의 선생님들은 대학병원 교수이거나 수술집도의인 경우가 많아 개인 진료 예약을 하는 게 적게는 수 일에서 많게는 수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호주사람들은 기다리다가 병을 키우는 케이스가 정말 많다. 


전문의에게서 정확한 병의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기까지 정말 진 빠지는 여정이다.  


게다가 메이저급 대형수술도 waiting list(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몇 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고관절 수술 하나 하려고 6개월에서 3년까지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나보다 고관절 수술이 더 급한 대기환자를 먼저 수술해야 하는 병원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의료체계가 그렇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고관절이 불편한 환자는 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를 찾게 된다. 최고의 수술 전문의가 무료로 수술을 집도해 줘서 좋긴 하지만 내 차례를 기다리다 병을 키우게 되는 상황이 참 우울한 호주사회다. 


호주의 안과와 치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공공 의료복지의 적용범위가 가장 적은 분과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치료비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안과와 치과는 세분화된 전문 분야여서 주치의 선생님을 통해 소견서를 받기도 하지만 대개 직접 전문의를 찾아간다. 치과는 소견서 없이 주거지 근처 치과병원(dental clinic)에 가면 바로 치과의사 선생님(dentist)을 만나 진료를 받게 된다. 물론 비용이 엄청나다. 발치 하나만 하는데도 200불에서 300불이 든다. 안과는 주로 검안사(Optometrist)가 상주하는 안경점에 가서 시력검사를 한 뒤, 검안사가 안과 전문의(ophthalmologist/eye doctor)를 찾아가야 할 경우 소견서를 써준다. 그러면 안과전문의에게 연락해 진료예약을 하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으면 된다. 급한 증상일 경우 검안사가 소견서에 ‘위급(urgent)’이라고 적어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보다 안과질환이 위급한 환자의 치료 우선순위에 밀려 안과전문의 당일예약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호주사람들은 Private Health Insurance(개인의료보험)을 든다. 국가에서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자신의 개인의료보험으로 충당하고 Private Hospital(개인/사립병원)에서 발 빠른 의료케어를 받는다. 기다리지 않아서 병을 키우지 않게 되고 사립병원에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아 좋긴 하지만 비싼 사보험을 내고 기본생활을 유지하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호주국민은 국가의료보험(Medicare)에 의존한다. 


그래서일까? 


국가가 개인의 건강을 발 빠르게 책임져줄 수 없는 의료복지체계 때문인지 호주사람들은 가족의 건강관리가 평상시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학교 방과 후, 퇴근 후, 주말 할 것 없이 푸른 잔디와 바다가 있는 곳이면 뛰어들고 타고 던지고 엑티비티를 밥먹듯이 한다. 학교에서도 ‘매주 화요일은 스포츠데이(Sports Day)’처럼 아예 운동하는 날을 지정해 놓고 온갖 스포츠를 즐긴다. 그리고 일요일은 무조건 스포츠데이로 동네 럭비공원마다 도시락과 물병을 든 엄마들과 접이식 의자와 타월 등을 들고 다니는 아빠들로 만석이다.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어찌 보면 건강한 사회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약에 의존하려는 멘탈보다는 ‘이쯤이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라는 멘탈이 되려 호주사람을 더 강인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과 건강보험에 비하면 호주의 의료복지 시스템은 개인의 입장에서 영 탐탁지가 않다. 국민의 건강은 곧 국력이건만 보편적 의료복지를 제공해야 하는 연방시스템으로 아픈 개인이 더 아픈 개인을 위해 기다림이라는 희생을 해야만 하는 의료체계… 우울하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이렇게나 힘든 걸까... 호주사회가 칠흑 같은 밤처럼 어둡게 느껴지는 구석이다.  





덧 1. 정말 정말 어둡고 불편한 호주의 의료체계이지만 유일한 한 줄기 빛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호주에만 있는 독특한 시스템, 아니 꼭 있어야 하는 의료서비스. 바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왕진을 하는 의사, Royal Flying Doctor(RFD)로 이루어진 RFDS(royal flying doctor service)이다. 

대륙의 반 이상이 아웃백이라고 부르는 대형사막으로 이루어진 호주만의 특징으로 병원과의 접근성이 떨어져 생겨난 의료서비스이다. 호주 연방정부의 자금조달과 각 지역단체와 개인의 기부금으로 운영이 된다. 내가 살았던 서호주는 아웃백 한가운데에서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병이 들어 병원검진을 가려하면 기본 삼사백 킬로, 왕복 오백 육백 킬로를 차로 이동해야 한다. 물론 이동거리 중에 편의시설이라고는 한 개도 없다. 종종 화장실도 없어서 아웃백 한가운데 덤불을 의지해 볼일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119 전화하듯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RFDS에 전화를 하고 당직근무를 하는 RFD가 소형 의료비행기를 타고 아웃백 한가운데까지 왕진을 온다. 서호주에선 무료 서비스다. 필요하면 근처 병원으로 환자수송까지 같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중요한 타이밍인 골든타임(Golden Hour)을 놓치지 않고 치료를 하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자 서비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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