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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어버드 Feb 10. 2024

마이너리티라서 좋다!

To be a new major!  

오랜 기간 호주에서 문화, 인종, 언어적 소수자로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속에 품게 된 물음이 하나 있다. 


“문화적, 인종적, 언어적으로 다수가 아닌 소수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소위 말하는 모범적 소수(model minority)라는 타이틀 아래 영원한 비주류로 살아가야 하는 게 소수자의 팔자고 운명인 걸까… 사실 서양국가에 발을 디디고 사는 동양인에게 드리워진 모범적 소수인종이라는 타이틀은 마치 감옥 같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동양인이라면 교육 수준이 높아 똑똑하고(smart),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열심히 하며(hard-working),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모범시민(law-abiding citizen)으로 사회경제적 부를 많이 축적한다는 ‘model minority(모범적 소수)’라는 타이틀은 언제부턴가 동양인에게 요구되는 서구사회의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마치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열녀비라는 타이틀을 주며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암묵적 강요처럼. 


문화적 시민성(cultural citizenship)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모범적 소수라는 타이틀은 서양국가, 즉 서구사회의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또 다른 지배담론(hegemonic discourse)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서구중심의 지배담론에 식민지화된 한인 이민 1세대 동양인 부모들은 2세들에게 서구사회의 주류진영에 편입해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그 길만이 성공하는 인생길이고 이민사회의 성공스토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문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되는 것, 법대를 나와 법조인이 되는 것 등 고리타분하고 뻔한 이민자 출신 소수자들의 성공 클리쉐(cliché) 말이다. 마치 의사, 판사, 변호사 등의 전문적인 직업이 문화 인종 언어적 소수자들의 마이너 인생을 보완이라도 해줄 것처럼 자신들의 2세들에게 온갖 노력과 희생을 퍼붓는다. 정작 스스로는 서구사회의 기득권층이 양산한 지배담론에 넘어간 피식민자들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2세들은 의사가 되어 하얀 가운을 입고 돈을 벌고 1세인 부모세대에게 자랑거리가 된다. 그렇지만 의사가운을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길을 나서면 여전히 소수인종이고 마이너일 뿐이다. 그래서 앵글로 백인이 주류가 되어 살아가는 호주와 같은 곳에서는 상대적으로 문화 인종 언어적 소수자 출신의 전문직들이 강한 멘탈로 유연성 있게 버텨야 하는 게 현실이다. 주류의 시선에 나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거나 그들의 사고방식이 나와 결이 맞지 않아 더 많은 이야기와 설득을 해야 한다거나, 그러다가 지쳐 초라해지는 자신을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우울감이 엄습한다. 


그런데 다행히 전 세계적으로 기존의 주류진영에 편입되지 않고 새로운 주류가 되어 삶을 살아가는 문화 인종 언어적 소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적어도 내가 사는 호주에서는 새로운 주류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마이너리티들이 미디어의 발달과 영향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디그라(Mardi Gras)라고 하는 지상최대의 성소수자들의 축제가 있다. 동성애가 불법이었던 1978년도부터 자유화가 된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호주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정부의 지원으로 시드니 게이 레즈비언 위원회와 함께 해마다 시드니 킹스크로스 거리에서 개최된다. 마디그라로 인한 문화, 예술, 패션, 뷰티 산업의 부흥은 또 다른 주류문화를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시드니, 멜버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여장남자들의 화려한 엔터테인먼트쇼인 drag queen show가 흥행 보증 수표가 되었다. 

78년도부터 해마다 시드니 킹스크로스에서 개최되는 마디그라 퍼레이드 모습 (사진출처: wearitpurple.org.au 및 구글이미지)
동성애가 불법이던 1978년 시드니 경찰 vs 현재 시드니 경찰 (사진출처: mardigras.org.au)

그리고 호주에서 모욕적으로 ‘WOG(워그)’라고 불리는 동남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호주 드라마, 코미디, 영화산업에 히든카드가 되어 자신들의 문화를 과장된 유머로 풀어내며 호주사회의 또 다른 주류가 되었다. 80년대 후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Now)라는 호주 시트콤은 그리스 이민자 출신들이 모여만든 코미디 히트작으로 에피역을 맡았던 그리스 이민 2세인 메리 쿠스타스(Mary Coustas)는 지금껏 호주 국민들이 환호하는 마이너출신 코미디언이다. 

아크로폴리스 포스터컷 및 스크린샷 - 까만 푸들머리를 한 여자가 메리 쿠스타스다. (사진출처: Google Image)

무엇보다 요즘 호주 요식업계의 동양인 스타셰프들이 또 다른 주류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사실 서양음식의 체계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적이고 향토적인 음식을 기발하게 응용하고 풀어내 단조로운 호주 식문화(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식 음식이 그 베이스다)에 불꽃 튀는 천상의 맛을 선사해 식도락 열풍을 몰고 있다. 

70년대 베트남 난민출신 루크 응위옌(Luke Nguyen)은 이름자체가 브랜드인 스타셰프이자 호주 TV 셀렙으로 자신의 고향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 제이미 올리버처럼 현지에서 구한 식재료로 카메라 앞에서 즉흥요리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말레이시아 태생 호주 1.5세인 양보령(Poh Ling Yeow: 杨宝玲)은 고든램지 절친으로 2009년 호주 마스터셰프 준우승자이자 다가오는 2024년 호주 마스터셰프 심사위원까지 맡게 된 유명 요리사다. 그리고 호주 마스터셰프와 주니어 마스터셰프 심사위원으로 이름이 더욱 많이 알려진 싱가포르 이민 2세 멜리사 량(Melissa Leong) 또한 유명한 음식평론가다. 이외에 법조계 출신 뇌섹남으로 말레이시아 태생 호주 요리사 아담 리아우(Adam liaw), 중국계 호주인 3세로 유명한 요리사 카일리 쾅(Kylie Kwong), 호주 대형마트 콜스와 울워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마리온의 키친(Marion’s kitchen)이라는 음식브랜드로 유명한 태국계 호주인 요리사이자 사업가인 마리온 그라스비(Marion Grasby) 등등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소수자들이 호주 요식업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왼쪽부터 아담리아우, 마리온 그라스비, 멜리사 량 (사진출처: Google Image)
왼쪽부터 루크 응위옌, 카일리 쾅, 양보령 (사진출처: Google Image)

동양인 출신 유명 요리사들 덕분인지 많은 백인 셰프들이 동양음식을 공부하고 동양권 국가에 머물며 현지 식재료를 익히고 동양문화에 대한 또 다른 푸드 오리엔탈리즘에 빠지고 있다. 사실 호주 주류인종 백인들은 일식, 한식, 중식, 월남식, 태국식 등 동양음식을 정찬으로 파는 레스토랑에 가는 일을 마치 식문화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고 새로운 주류적 문화에 자신들도 한 발 들인 것처럼 즐거워하고 좋아한다. 단조로운 호주의 식문화에 이국적인 낙이 아닐 수 없다. 


호주 요식업계 동양인 셰프들은 마이너의 입장에서 보면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소수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살려 새로운 주류사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고, 메이저의 입장에서 보면 단조로운 주류 문화에 다각화, 혹은 다원화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영향력을 제공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마이너 출신이지만 새로운 주류로 발돋움한 케이스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수문화, 소수인종, 소수언어 출신이기에 가능하고 타당한 일이라는 점, 그리고 마이너라서 지니게 된 고유성이 주류진영의 기득권층에게 좋은 영향력과 파급력으로 다가가는 일이라는 점, 그래서 나의 뿌리와 출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기게 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물어보자.


문화적, 인종적, 언어적으로 다수가 아닌 소수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동양인인 우리는 그저 쥐 죽은 듯이 모범적 소수(model minority)라는 타이틀 아래 비주류로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그리고 고유성을 드러내면서 살자! 

메이저에게 없는, 즉 마이너이기에 가질 수 있는 특별하고 특수한 문화 인종 언어적 고유성을 드러내고 활용하는 삶이 곧 비주류가 아닌 새로운 주류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서구사회의 지배담론에 휩싸여 이민자니까 이방인이니까 문화적, 인종적, 언어적으로 마이너이니까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학력 전문직을 가지고 서구의 주류진영에 편입해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클리쉐(cliché)는 재외국민 250만 시대에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 

성장할 수 없기에… 

성장이 없다면 진화 또한 없기에… 

진화하지 못한 인간에게 남는 건 도태 혹은 퇴화이기에…  


마이너리티의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하는 삶이다. 주류적 시선 속에서 방황하고 고통받으며 포용과 용서라는 힘을 길러야 하는 성장통이 큰 삶 말이다. 그래서 존중받아 마땅한 소중한 삶이고 귀중한 인생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이겨내고 성장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주류들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영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외칠 필요가 있다. 마이너리티라서 좋다! 새로운 주류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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