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국어 아닌 0개 국어 통역사
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통번역사
학사는 영어학 졸업, 현재 석사는 독일어 통번역을 전공하고 있지만 나의 언어생활은 절대로 녹록지 않다.
물론 부끄럽지만 가끔 발성과 표현력이 좋아 꼭 아나운서 같다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국내파인데 어떻게 영어와 독일어를 모두 잘하는지 칭찬과 비결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실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마치 백조가 물 밑에서 부단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나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나는 인풋을 쌓아 올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휘력과 문장 구사력에 있어서 편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이는 비단 영어와 독일어에 국한된 말이 아니다. 모국어인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매일신문을 소리 내어 읽고 생소한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기도 하는 등의 꾸준한 노력이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늘 '괜찮다', '좋다', '별로다', '나쁘다' 등의 아주 단순한 어휘만 사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때면 꼭 한 글자만 틀리게 말해 듣는 이조차 맞는 말인가 긴가민가하게 만들 때가 빈번하다. 한국어도 이 모양인데 하물며 영어와 독일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내파인 나는 공부하지 않으면 바로 밑천이 드러난다. 통번역대학원에 갓 입학했을 때는 철없는 마음에 바이링구얼 동기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마치 특혜를 입은 것처럼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바이링구얼 동기 언니를 보며 이중언어 구사자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기 언니는 유년기를 독일에서 보내 어린 나이에 한국 공립 초등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몹시 힘들었고 여전히 한국식 사고방식이 낯설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한국에서 보낸 탓에 아이가 말하듯이 쉬운 독일어만 구사하는 것 같은 핸디캡을 토로하기도 했다. 종종 언니는 국내파인 나의 한국어 발화가 부럽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렇게 대학원 과정을 보내며 통역이란 어찌 보면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며, 단순히 언어를 잘해서만 되는 것도 아니란 것을 배웠다. 언어가 내 머리와 입술에 편해질 때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말의 근육을 키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언어가 편해진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대학원 첫 학기 통역 수업에서 A 교수님께서는 통역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얘기해주셨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준 말이기도 했다. 이 말은 그저 언어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통역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해당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다. 가장 좋은 예가 한동안 핫했던 봉준호 감독의 통역사 '샤론 최'씨다. 샤론 최 통역사는 국내파지만 학부 때부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해 영어가 유창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영화감독으로서 영화계에 대한 전문적인 배경지식도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해서 봉준호 감독 통역을 위해 봉 감독의 모든 인터뷰를 찾아보며 또 공부했다고 한다. 외국어 실력+전문지식+노력이 합쳐져서 완벽에 가까운 통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타고난 언어적 센스와 눈치, 연사를 위한 낄끼빠빠 스킬까지 탑재된 천상계 통역사로 보인다).
통번역을 공부하고 이것으로 밥 먹고 산다는 직업병 때문일까. 가끔은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하는 대화 같은 일상에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말하는 도중에 적절한 어휘가 생각이 안 나고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자꾸만 말 끝을 흐리는 자신을 보면 (거기다 공대생 남편이 문과인 나보다 말을 더 유려하게 하기까지 한다면) 굉장한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이런저런 스트레스 때문에 몸에 탈이 나는 상황을 몇 차례 겪고 난 후 마음가짐을 조금 달리 하기로 했다. 오직 공부를 통해서만 아주 조금씩 메꿔질 수 있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국내파로서 독일어와 영어는 내게 영원히 외국어다. 외국어를 정복하기는커녕 지금 미국에 살며 한국어도 잊혀져가는 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도 공부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이 세 개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와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마치 '어쩌면 무한대에도 끝이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과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닿을 수 없기에 나는 오늘도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저 오늘도, 어제와 내일처럼, 오늘의 몫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