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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비 Jul 08. 2022

스물셋에 독일어를 배워 통번역을 공부하기까지

극한 직업인 줄 몰랐지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하던 나는 막연히 제2외국어 하나 정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학부 교양필수 과목으로 무조건 제2외국어를 과목을 하나 수강해야 했다. 나는 당시 오빠가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독일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독일어를 신청했다.


'교양 독일어' 강의를 맡으신 독일어과 교수님은 '교양' 독일어라는 과목명에 걸맞게 인사말과 복잡한 문법을 제외한 핵심적인 문법 정도만 수업에서 다루셨다. 본인의 유학시절 에피소드가 들어간 사담도 절대 빼놓지 않으시며 학생들에게 맥주와 소시지의 나라 독일에 대한 낭만을 잔뜩 심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독일어의 진면모를 모른 채 ( 독일어 문법을 공부하다 보면 '영어가 제일 쉬웠어요'가 절로 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짧은 문장만 겨우 만들 수 있는 실력이었음에도 당시의 나는 독일어를 꽤 잘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급기야는 졸업 후 독일에 가서 본격적으로 독일어를 공부하고 직장을 얻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2013년 12월 학부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졸업식도 치르지 않은 채 부푼 꿈을 안고 독일로 떠났다. 그리고 1년간 어학원에서 독일어를 공부한 후 바로 독일에서 직장을 잡으리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어디 가서 '독일어를 좀 한다!'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C1 (독일어 상급 레벨)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아주 기본적인 문법과 어휘만 아는 생기초 수준에서 1년 안에 C1 레벨을 취득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소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어학원에서 하루에 8시간씩 수업을 듣고 돌아와서는 한국 문법책으로 복습을 하며 1년간 거의 종일 독일어를 공부했다. 당시 재정적으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더 절실하게 공부했던 것 같다.


매일 새벽 4시 나는 졸린 눈으로 일어나 프렌치프레스에 커피를 한가득 내렸다. 커피를 마시며 새벽기도를 하고 독일어 성경 책자를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후 어학원에 가기 전까지 독일어 시험 기출문제를 풀고 나면 오전 7시 정도가 되었다. 어학원에 갈 채비를 하고 집 앞 5분 거리 지하철 역으로 향해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또다시 8시간을 꼬박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복습과 숙제를 했다. 그리고 새벽에 풀었던 기출문제의 오답노트 정리까지 모두 마쳐야만 비로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여유시간에는 닥치는 대로 독일어를 듣고 독일어 텍스트를 읽으며 최대한 독일어에 노출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1년을 보낸 후 나는 목표한 대로 C1 레벨을 취득할 수 있었다. 2015년 4월에는 드디어 국내 대기업 독일법인에서 생의 첫 직장도 얻었다.


그러나 쉼 없이 달리기만 했기 때문일까. 독일에서 약 3년 반 정도를 보낸 후 나는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도망치듯 한국으로 귀국했다. 어렵사리 쌓아 올린 독일어 실력도, 이제 겨우 적응이 되어 꽤 편안했던 회사생활도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는 한국이 그리웠고 아무런 미련 없이 독일 생활을 단숨에 정리해 버렸다.


돌이켜보면 내 20대 중반의 기억은 모두 독일에 있다. 스물셋, 독일어와의 첫 만남이 있었고 마음을 뺏겨버렸다. 그 해가 끝나기도 전에 결국 독일로 떠나버린다. 스물넷, 독일어를 배우는데 오롯이 1년을 보냈다. 스물다섯, 독일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2년간 몸과 마음이 소진될 정도로 고군분투했다. 이방인으로 사는 외로움 때문에, 여전히 부족한 독일어 때문에, 외국인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나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매일이 전투였다. 그렇게 새로운 언어와 문화, 그리고 직장생활에까지 적응하기 위해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참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에 귀국하고 한 달은 독일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왜일까?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나는 독일계 기업인 B사에 이력서를 냈고 추측건대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면접에 합격하여 입사하게 되었다. 독일과 독일어는 나에게 애증의 존재였지만 그것이 내 삶에 없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마치  20대 중반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독일과 연관된 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대부분 숫자와 씨름하는 일이 8할이었고 (천상 문과인 나는 숫자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약 1년 8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했던 28살의 나는 회사생활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라는 사람한테는 어떤 일이 어울릴까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외국어와 관련된 일이 좋겠다는 다소 뻔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서는 영어와 독일어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모색했다. 기업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회화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영어와 독일어 번역 일도 틈틈이 했다.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며 과외도 하고 어학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을 시도하며 몸소 부딪혔을 때 나에게 맞는 일을 점점 좁혀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내가 원하는 것은 통번역대학원 진학이라는 윤곽이 명확해졌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난 후 낮에는 어학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통대 입시에 매달리며 주경야독을 몸소 실천하는 1년을 살았다. 사실 나의 영어와 독일어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실력이 비슷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어는 글로벌 시대에 평생 사용할 것이 뻔한데 독일어는 내가 업으로 삼지 않는 이상 도무지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한국어/영어/독일어 3개 언어 과정도 있긴 하지만 준비기간이 여의치 않아 이는 애초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독일어를 계속 간직하고 싶은 단순한 바람으로 독일어를 선택하여 통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나는 통번역사로서 작은 발돋움을 시작했다. 통대 진학 1년 동안 삶에 많은 변화도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편의 꿈을 응원해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학원을 휴학하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다. 지긋지긋했던 통대 생활로부터 막상 벗어나니 동기들과 교수님들, 사람 피 말리는 통대 공부가 그리워진다. 미국에서는 당연 영어를 쓸 일이 더 빈번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서도 독일어와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때마다 번역을 하고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전히 독일어와 함께 하고 있다. 


스물셋에 찾아와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리고야 만 독일어. 나는 독일어를 좋아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수없는 슬럼프와 번아웃의 경험을 떠올리면 '좋아한다'라는 표현은 독일어에 대한 나의 감정을 오롯이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달콤하지만 씁쓸함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애증'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듯하다. 때로는 나를 괴롭게 하겠지만 살아갈 날 계속해서 함께 하고 싶은 친구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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