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추꽃 Feb 25. 2022

'전념'을 읽고

전념의 반문화는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무언가에 '전념'하는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장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러나 '전념하지 않는 것'이 '전념하는 것' 보다 하등한 선택이고, 끈기 있는 사람만이 전념하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보다 큰 가치를 얻어가며, 이제는 전념하지 않는 문화가 주류라는 논리를 펼치는 작가의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전념하는 삶'과 '전념하지 않는 삶'이 대척점에 있다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전념하는 삶과 전념하지 않는 삶만 있겠는가? 우리는 전념과 전념하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을 살고 있을 뿐이다. 학생 때는 보통 학업에 전념한다. 이때 가수 지망생처럼 학업에만 전념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가수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가수라는 직업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가수가 되지 않고 학업에 전념했던 자는 또 대학교에 입학해 학업에만 전념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전념해서 사업이 대박 날 수도 있다. 취업을 한 사회초년생도 누구는 한 회사의 회사생활에만 전념해 몇십 년을 다녀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누구는 다른 회사를 경험해보러 나갈 수도 있다. 나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데 나만 그런가?


흑백논리로 두 가지 삶으로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옛날이야기다. 여자는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하고,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며 보통 한 회사에서 정년을 다 채울 때까지 전념하고. 작가가 언급하긴 하지만 역할이 고정적이었을 때는 오로지 전념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전념에는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적의식이 주는 자유, 관계의 깊이가 주는 기쁨, 오랜 관계가 주는 편안함 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삶이 주는 기쁨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한 우물에만 전념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일 뿐,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형태의 전념이 더 어려워서,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 불안해서, 유혹에 흔들려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액체 인간'으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N 잡러를 시도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하는 것도 하나에만 전념하는 것 못지않은 능력과 비용, 시간 투입이 필요한 일이다. 즉,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면 순간순간의 강한 전념의 순간들이 요구된다. 그렇게 열심히 시도해보는 사람들은 목적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을 벗어나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작가가 말하는 전념이 '수직적 전념'이라면, 이것은 '수평적 전념'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게다가 조직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는 행복은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액체 인간으로 살면서 가치관이 비슷하게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새로운 영감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꼭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작가에겐 어디 한 곳에 정착되어 있지 않은 불안하고 불행한 '액체 인간'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겐 이렇게 선택지를 제대로 넓혀 자신을 다기능화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일 수 있다. 꼭 다시 고체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물론 제시된 사례들처럼 선택 장애로 불행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일진 의문이다. 늘어난 선택지들 덕에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다양한 기회들을 잡고 더욱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왜 꼭 수박 겉핥기식의 깊이 없는 경험을 한 사람처럼 부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이건 작가의 편견 아닐까? 오직 한 악기만 10년을 배워서 전문가가 되어야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악기에 1년씩 투자해 10개의 악기를 경험해본 사람의 경험은 하등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만이 간단히라도 악기들 간 비교를 하고, 누군가에게 적합한 악기를 추천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음악 장르를 접해본 사람만이 결국 퓨전 음악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결국 넓이와 깊이의 문제이지 넓이가 깊이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직장에서는 부서를 옮기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사장님의 논리는 '한 분야에만 오래 종사해야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우물만 파게 한다는 건 숲을 보는 능력을 가진 직원을 기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는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고 분야 간 조화를 이끌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도 있어야 운영이 가능하다. 이는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두 역할 모두 중요한 만큼 사회도 두 역할을 가진 사람을 모두 배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보다 깊이 있는 변화는 내부에 전념하는 자만이 일으킬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 우물만 판 자는 그 분위기에만 동조되어 그곳에 고여 썩을 위험도, 비판적인 생각을 못할 위험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전념하기에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한 분야에만 몇십 년씩 전념해 대단한 전문가가 된 전념하기의 영웅들을 우리는 굉장히 부러워한다는 말에는 반만 공감한다. 당연히 그런 분들을 존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방면에 능력을 갖춘 사람들도 우리는 똑같이 '능력자'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직장도 다니면서, 육아도 하면서,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온라인 수업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봐도 정말 대단하고 멋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념하지 않는 것을 작가처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전념하기 힘들어서 전념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설득력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한 우물만 파는 형태의 전념만 하는 삶을 살 것인지 수평적 전념의 삶을 살 것인지는 그저 사람의 다양한 성향으로부터 비롯되는 선택일 뿐이다. 액체 인간과 고체 인간 둘 다 비판받지 않고 공존해 마땅하다. 그리고 전념하는 순간과 전념하지 않는 순간이 혼재되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실 둘의 동기를 구별하는 것도 애매하다. 작가의 생각처럼 우리는 한 사람에게 전념하기 위해 결혼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내, 엄마, 할머니, 며느리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끌려서, 기존의 역할만 하는 것은 지루해서 결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몇 년 동안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고 있어서 한 분야에 전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동안 해오던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의 선택지를 늘리기 위함이다. 정해진 것이 없는 액체 인간 상태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조물주의 의도와 부합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주장하는 '전념하는 반문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의 친절>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