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기술

가까움은 사랑이지만, 거리는 존엄이다

by 데브라

우리는 가까워지려고 애쓴다.

가까움은 따뜻하니까.
가까움은 외로움을 줄이니까.
가까움은 사랑의 증거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가까움에는 함정이 있다.
가까움이 깊어질수록
나는 경계를 잃기 쉽다.
경계를 잃는 순간,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기울어진 관계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존엄이다.


거리는 차갑다고 배웠다.
거리 두기는 상처를 준다고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를 죄책감으로 배운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하지만 거리는 이기심이 아니다.
거리는 ‘나’라는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형태가 무너지면 사랑도 무너진다.


가까움이 깊어질수록
상대의 기분이 나의 날씨가 된다.
상대가 웃으면 내가 산다.
상대가 차가우면 내가 죽는다.
이 상태는 사랑이 아니라 의존이다.
의존은 늘 불안하다.
불안한 사랑은 자주 확인한다.
자주 확인하는 사랑은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피곤함은 결국 거리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상처받는다.
상처받은 이유는 단순하다.
처음부터 거리를 죄로 배웠기 때문이다.


거리의 기술은 냉정함이 아니다.
거리의 기술은 선택이다.
가까워질 때 가까워지고,
물러날 때 물러나는 선택.
그 선택은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


거리는 관계를 분명하게 만든다.
무엇이 내 몫이고, 무엇이 네 몫인지.
무엇을 내가 감당해야 하고,
무엇을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지.
이 분명함이 없으면 관계는 쉽게 혼란이 된다.
혼란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해석을 낳고,
해석은 칼날이 된다.


거리는 또한 욕망을 다듬는다.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
상대의 시간까지 통제하려는 욕망,
상대의 마음을 확정하려는 욕망.
이 욕망이 줄어들수록
관계는 더 오래 숨을 쉰다.
숨을 쉬는 관계는 덜 무겁다.
덜 무거운 관계는 더 진실하다.


거리가 생기면 두려움이 올라온다.
“멀어지는 건 아닐까?”
“끝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끝나는 건 늘 ‘거리’ 때문이 아니다.
끝나는 건 대개
거리를 만들지 못해서 생긴 피로 때문이다.
가까움만 강요된 관계는
언젠가 질식한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 형태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는 차갑지만,
그 차가움이 존엄을 지킨다.
존엄이 지켜질 때 사랑은 덜 초라해진다.


오늘 당신이 잃은 것은 무엇이었나.
사랑이었나,
아니면 존엄이었나.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거리는,
얼마나 되었나.

이전 08화착함의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