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의 미학

불꽃처럼 살면, 재는 더 빨리 쌓인다

by 데브라

소진은 대개 칭찬에서 시작된다.

“열심히 한다.”
“책임감이 있다.”
“대단하다.”
그 말들은 나를 세운다.
하지만 그 말들은 동시에
나를 태우는 장작이 되기도 한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계처럼 다룬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피곤함을 신호로 보지 않고
장애물로 본다.
장애물을 넘는 사람은 강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더 넘는다.
넘는 동안 그는 ‘좋은 사람’이 된다.
좋은 사람이 되는 동안
그는 ‘자기’가 되는 일을 잃는다.


소진에는 이상한 미학이 있다.
지쳐 있어도 멈추지 않는 것이
어떤 숭고함처럼 보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불꽃의 운명은
언제나 짧다.
불꽃은 빛을 주지만
자기 자신을 남기지 않는다.
남는 것은 재다.


소진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소진은 의미의 문제다.
‘왜’가 사라지면
‘어떻게’만 남는다.
어떻게만 남은 삶은
기술이 되지만
삶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잘하면서도 공허하다.
잘하는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공허는 다시 더 열심히를 요구한다.
열심히는 공허를 덮는 가장 그럴듯한 담요니까.


소진은 관계에서도 자란다.
기대, 인정, 역할.
나는 그 역할을 잘 해내면
사랑받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더 애쓴다.
애쓰는 동안 사람들은 편해진다.
편해진 사람들은 더 기대한다.
기대가 커질수록
나는 더 버틴다.
버티는 것이 습관이 되면
버티지 않으면 죄책감이 된다.
죄책감은 사람을 쉽게 태운다.


소진의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가 남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나만…”
냉소는 마음의 방어다.
너무 오래 태운 사람은
사랑을 계속 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감각해진다.
무감각은 휴식이 아니다.
무감각은 경고다.


소진을 멈추는 시작은
더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더 빠르게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태우는 방식’을 의심해야 한다.
왜 나는 늘 불꽃이 되려 하는가.
왜 나는 늘 증명하려 하는가.
왜 나는 멈추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운가.
그 질문이 없으면
휴식은 다시 노동이 된다.


불꽃이 아니라 등불이 되어야 한다.
등불은 오래 간다.
등불은 자기 연료를 다 안 태운다.
등불은 밝지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미학이 바뀌어야 한다.
멋있는 삶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이 멋있어야 한다.


오늘 당신이 태우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시간이었나,
몸이었나,
아니면
당신이 당신을 대하는 방식이었나.

이전 15화집착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