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넘어선 자기 수련
현대인들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와 고통을 마주할 때 흔히 철학책을 펼쳐 든다.
니체의 초인, 붓다의 무아,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읽으며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나마 지적인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위로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본질적인 고통은 다시 고개를 든다.
철학책은 고통을 해석하는 훌륭한 '진통제'가 될 수는 있어도,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치료제'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단 10분이라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진 문제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 철학은 방대한 사유의 탑을 쌓는 일을 멈추고,
선도(仙道)나 명상과 같은 '자기 수련'으로 회귀해야 하는가?
현대 철학과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가장 큰 맹점은 아주 단순한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얼룩이 묻어 있다면, 우리는 거울을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 얼굴을 닦아야 하는가?"
당연하게도 얼굴의 얼룩을 지워야 거울 속의 모습도 깨끗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끊임없이 '거울(외부 세계)'을 닦으려 애쓴다.
세상을 비판하고, 타인을 원망하며, 더 나은 사회적 시스템이나 더 정교한 철학적 이론이라는
수건을 들고 얼룩진 거울 표면만 문지르고 있는 격이다.
현실이라는 거울은 결국 내 마음과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반사체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부 세계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얼룩이 묻은 진짜 진원지인 '나의 내면'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적 사유가 끝나는 지점에서 자기 수련이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
내면의 얼룩을 닦아내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은 우리의 의식을 복잡한 머리에서 몸의 중심인
'하단전(下丹田)'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쉼 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만들어낸다.
현대 철학 역시 이 '사유의 굴레' 안에서 길을 잃기 쉽다.
그러나 호흡 수련을 시작하고 하단전에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느리지만 서서히, 실체 없이 떠돌던 잡념들과 과거의 회상,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힘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며 의식이 지금 여기,
나의 몸 중심으로 깊게 뿌리내릴 때 내면은 마침내 깊은 고요함에 이른다.
수련을 통해 얻은 이 고요함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평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면이 고요해지면, 나를 둘러싼 현실 또한 그에 응답하듯 고요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거친 감정의 파도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모든 인연이 부딪히고 모든 상황이 문제로 다가왔지만,
내면의 얼룩을 지우고 맑은 상태가 되면 똑같은 현실도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변하는 것,
즉 내면의 고요가 외부 현실의 평화로 전이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길을 안내하는 훌륭한 지도다.
그러나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직접 두 발로 걷고 땀을 흘려야 한다.
현대 철학이 지적 유희나 공허한 말의 잔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궁극적으로 지식을 내려놓고 생생한 삶의 감각을 깨우는 '수련의 장(場)'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아내는 선도적 수행이야말로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되찾고 삶의 근본 문제를 풀어내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실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