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이 늦어지는 사이
나는 요즘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묻는 질문이 싫다.
대답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대답이 늦어지는 사이,
다른 대답이 먼저 도착한다.
추천.
처음엔 추천이 고마웠다.
찾는 시간을 줄여주고, 헤매는 시간을 덜어줬다.
선택의 피로를 덜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피로가 줄어들면 삶이 나아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추천은 늘 내가 지치길 기다리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목록을 훑는다.
내가 고른 것처럼 보이게 정렬된 것들.
이미 ‘나’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들.
내가 하지 않은 선택들이
내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처음에는 알아챘다.
이건 내가 듣던 음악이 아니다.
이건 내가 읽던 문장이 아니다.
이건 내가 웃던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알아채는 일이 귀찮아졌다.
귀찮음은 편의의 문을 연다.
나는 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도 모른 척했다.
추천이 내게 말을 건다.
“이걸 좋아하실 것 같아요.”
‘같아요’라는 말이 가장 교묘하다.
확신처럼 들리지만 책임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책임을 넘겨받는다.
“맞아, 난 이걸 좋아해.”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나는 점점 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에는 생각이 필요 없다.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것은 가볍다.
가벼운 것은 자꾸만 중독처럼 남는다.
나는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것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찾으려다 멈췄다.
찾는 순간부터 내가 낡아 보일까 봐.
추천을 거스르는 취향은
불편해 보일까 봐.
취향에도 예절이 생겼다.
너무 튀지 말 것.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 것.
너무 깊게 좋아하지 말 것.
나는 좋아함을 조절하는 법부터 배웠다.
추천은 선택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추천은 선택을 유도한다.
유도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절은 의심받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못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보다
좋아해도 되는 것을 고르는 데
익숙해진다.
그 사이에 내가 사라진다.
나는 화면을 넘기며 생각한다.
이 목록 속에 ‘나’가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내가 고른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에 남지?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더 빨리 고른다.
고르면 안심이 된다.
고르기만 하면 내가 아직 기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능한다는 말이
살아있다는 말과 닮아버린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오늘도 추천을 누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무엇을 내주고 있는지 떠올리려 한다.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사실이
가장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