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하는 삶
나는 요즘 기억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는 방식이 너무 불안정하다는 걸 알게 됐다.
대신 기록을 믿는다.
기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날짜가 있고, 시간이 있고, 저장이 있다.
저장은 안전해 보인다.
안전해 보이는 것은 의심받지 않는다.
처음엔 기록이 나를 도와주는 줄 알았다.
잊지 않게 해주고, 실수를 줄여주고, 불필요한 다툼을 막아준다.
“그때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여기 남아 있잖아.”
기록은 항상 나보다 침착했다.
나는 침착한 것을 부러워했다.
나는 늘 늦게 이해했고, 늦게 후회했고, 늦게 사과했다.
기록은 그런 나를 대신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록은 나를 대신해주지 않는다.
기록은 나를 규정한다.
나는 어떤 일을 겪고도
그 일을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보다
‘무엇이 남아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남아 있지 않으면
없는 일 같아진다.
없는 일 같아지면
나는 그 일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기억하려 하면 마음이 어지러워지니까.
나는 점점 더
남길 수 있는 감정만 느낀다.
남길 수 있는 말만 말한다.
남길 수 있는 관계만 유지한다.
남길 수 없는 것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편이 편하다.
편하다.
나는 그 편함이 무섭다.
어떤 날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한다.
후회는 감정인데
내 손은 감정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내 손은 기록처럼 움직인다.
삭제.
편집.
수정.
정정.
나는 이미 말해버린 말을
말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망친다.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말의 무게를 줄인다.
말의 무게가 줄면
사람의 무게도 줄어든다.
나는 내 말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가벼운 사람은 상처를 덜 준다.
가벼운 사람은 책임을 덜 진다.
가벼운 사람은 오래 남지 않는다.
오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나는 가끔 내 기록을 훑어본다.
언제 무엇을 샀는지.
언제 어디를 갔는지.
누구와 무엇을 나눴는지.
그 목록을 보고 있으면
내가 나를 이해하는 대신
내가 나를 조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조회는 차갑다.
차가운 것은 정확해 보인다.
정확해 보이는 것은 진실처럼 보인다.
그런데 진실은
정확함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한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리다가 멈췄다.
기억 속에서는 그 사람이 울고 있었는데
기록 속에는 웃는 표시만 남아 있었다.
그 웃음이 내 기억을 밀어냈다.
기록이 맞는 것 같았다.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기록이 정리되어 있으니까.
나는 내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커질수록
나는 더 자주 기록을 찾았다.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
의심은 더 커진다.
나는 그 악순환을 알고도
멈추지 못한다.
기억은 흐린데, 기록은 선명하다.
흐린 것은 불안하고
선명한 것은 안전하다.
나는 안전을 택한다.
안전을 택할수록
나는 내 안쪽을 덜 본다.
내 안쪽을 덜 볼수록
나는 더 쉽게 동의한다.
동의는 기록을 남긴다.
기록은 나를 규정한다.
규정은
내가 나를 말하기 전에
나를 말해버린다.
나는 점점 더
내 삶을 살기보다
내 삶을 보관하는 데 익숙해졌다.
보관은 살아 있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보관이 편하다.
편의는 선의처럼 보인다.
그래서 위험하다.
선의는 의심받지 않으니까.
나는 오늘도 저장한다.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무엇을 내주고 있는지 떠올리려 한다.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사실이
가장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