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의미

by 우승

친한 친구가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다가 요즘 학교에 학폭이 발생해 골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심각한 학폭은 아니고 친구들 사이의 왕따 사건 정도라는데, 왕따라는 단어를 들으니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 친구가 ‘너 힘들었겠다’라며 나를 위로했다. 벌써 30년이 넘게 지난 일인데도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렸다. 잊고 살았지만 잊지는 못했다. 그 일은 좋게든 나쁘게든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까.


중학생 때였다. 부모님의 직장 문제로 나는 중학교 1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을 위해 좋은 동네에 집을 구했고 우리를 좋은 학교에 보냈다. 문제는 그 좋은 동네가 부유한 유대인, 즉 백인이 대부분인 동네였고 따라서 그 좋은 학교 역시 그랬다는 사실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 있던 학교라서 꽤 컸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학년에 나를 포함해 유색 인종이 정확히 5명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나 포함 한국인 2명, 중국인 1명, 동남아인 1명, 흑인 1명. 그나마 우리 학년에 유색 인종이 가장 많았고 다른 학년은 2명,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수조차도 이민자가 아니라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영어에 서툰 전입생들을 위한 ESOL 수업에는 나, 대만 여고생, 페루 남고생, 이렇게 딱 3명이었다. 이 말인즉슨, 그 중학교를 통틀어 영어를 못하는 애는 나 하나라는 뜻이었다.


지금이야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학교에서도 3학년부터 영어 수업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웠다. 나 역시 미국에 간다고 급하게 영어 과외를 몇 개월 받은 게 전부여서 나는 겨우 알파벳과 기본적인 자기소개 정도만 아는 상태로 미국의 중학교에 던져졌다. 영어를 못하니 수학을 제외하고는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고 당연히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나를 도와주려는 착한 아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대화도 안 통하는데 그 애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 상태로 어영부영 학교에 다니다 보니 6개월쯤 지나자 말은 못 해도 귀는 어느 정도 트였다. 문제는 그즈음에, 아이들은 여전히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나는 그들의 말을 상당 부분 알아듣고 있었던 시점에 발생했다. 친구가 없거나 아이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는데, 유독 2명이 나에게 못되게 굴기 시작한 것이다. ‘You have bad breath!’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그 문장. 어디선가 한국인은 김치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실제로 나에게 마늘 냄새 같은 것이 나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문장을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반복적으로 내뱉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 말을 들으면 웃으며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동안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 애들 때문에 나는 (나쁜 의미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나는 영어로 화를 내거나 따질 능력이 없었으므로 이따금씩 화장실에 가서 혼자 조용히 울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래서 카운슬러에게 구구절절 편지를 썼다. 꽤 길게. 그 애들이 나에게 했던 언행을 낱낱이 적어서 아무 말 없이 카운슬러에게 건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카운슬러가 나를 불렀고, 방에 들어가자 그 애들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색하게 착한 미소를 지으면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나에게 빌었다. 그 자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뒤로 그 애들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여전히 친구는 없었지만, 덕분에 나는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학교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심지어 한국에 돌아올 시기가 되자 이제는 미국에 더 있고 싶어졌다. 입이 트일락 말락 하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 년만 더 있으면 영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부모님의 사정상 예정됐던 1년보다 더 머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나이에 미국에 있었던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에 영어에 관해서는 남들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갈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라는 말을 너무나도 뼈아프게 경험한 시기였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또다시 미국행을 택하겠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과장 조금 보태, 나는 그때 배운 영어로 평생을 먹고 살았는데도, 그런데도 망설여진다.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그 1여년의 길고 아팠던 과정을 ‘고진감래’와 같은 말이나 ‘그래도 고생한 덕이 있다’와 같은 납작한 표현으로 퉁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 시간은 나에게 지나치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어쩌다보니 나는 초등학교는 두 곳, 중학교는 미국을 포함해 세 곳을 다녔다. 그리고 중3 때 이사한 동네에서 결혼 전까지 살았다. 타고난 기질이 그런지, 아니면 이사와 전학을 많이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친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친구 사귀기는 매번 힘들고 그렇게 겨우 사귀어도 언제 헤어질지 몰랐으니까. 그러니 친구들에게 내 마음을 전부는 주지 않고 적당히만 주어서, 그곳에 있는 동안은 즐겁게 보내되 헤어질 때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창 시절에 왕따 또는 자발적 아싸가 되기 직전의 미묘한 경계선에 서서, 단짝 친구는 굳이 만들지 않고 그저 모든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생활을 이어갔다. 분명히 나는 항상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친구 관계에 몰입하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김영하의 산문집 ‘말하다’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책을 읽다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쳤다. 얼마나 깊이 공감이 되었는지 내가 속한 거의 모든 단톡방에 이 페이지를 캡처해서 공유했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내 나이도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결혼과 출산으로 그간의 친구 목록에도 변화가 일고 있어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 40대들이 이 내용에 공감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다. 가장 크게는 (대부분의 경우에) 가정이 생긴다는 점.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에 예전만큼 친구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 또는 살림, 육아, 가족의 대소사를 소화하기에도 벅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외부의 누군가에 목을 맬 필요가 덜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친구 관계는 오히려 더 좋아졌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관계, 그러면서도 만나면 매번 즐거운 관계, 지금은 그런 무해하고 유익한 관계만 내 옆에 남았다. 물리적으로는 덜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더 가까운 느낌이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어렸을 때처럼 하루가 멀다고 전화하고 만나는 관계는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때는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거리가 생기면 외롭고 두려웠고, 어떤 틈도 없이 딱 붙어 있어야 겨우 안심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건 10대나 20대엔 누가 옆에서 백번 이야기해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정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내 안에 아직 남아있는 힘들고 외로운 어린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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