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오기 전에 부탁해요
사실 그동안 환자들이 콧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편할 수 있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콧줄을 꽂은 채로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의 환자의 마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나는 늘 간호사로서 환자를 만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환자를 말 그대로 납작한 일차원적인 '환자'로서만 대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병원에서는 간호사, 집에서는 딸 혹은 언니, 친구들에게는 친구로 존재하듯 다양한 방면에서 존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입체적인 사람이듯 환자 역시도 집에서는 가장, 직장에서는 직장동료 혹은 선후배 그리고 이웃에게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지금껏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채 환자를 병원에 입원한 사람, 그저 환자로서만 대했다는 생각에 민망하기가 짝이 없었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아픈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기도 혹은 아픈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성향과 더불어 각자의 상황 역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만약 아파서 입원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알릴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큰 병이 아니라면 가족이나 친구에게 알리지 않을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반성을 마치고, 환자가 결정을 한다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콧줄을 빼주어야겠다고 다짐한 후, 환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미리 콧줄을 빼는 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마침 회진을 위해 병동에 온 담당의사에게 넌지시 환자의 사정에 대해 알렸다. 담당의는 미소 지으며 환자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대답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내게 콧줄을 빼고 손주들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환자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준비했던 물품들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콧줄을 빼주었다.
환자는 "훨씬 편하네 고마워, 그리고 귀찮게 해서 미안해"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뭘 이런 걸로, 훨씬 멋지다 날도 좋으니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가족들이랑 기분전환도 좀 하고 오면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가 되겠는데?"라고 답했다. 그렇게 환자가 가족들을 만날 채비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의 가족들이 방문해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들은 환자가 평소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아프다, 힘들다는 표현을 잘하지 않는 성향이라 자주 아픈 곳이 없는지에 대해 물어봐주기를 부탁했고, 나는 그렇지 않아도 환자를 마주칠 때마다 물어보고 있고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가족들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환자의 방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몇 분 후, 10대 후반즈음으로 보이는 손주가 내게 다가와 할아버지를 잘 돌봐주어서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작은 초콜릿 상자를 건네주었다.
임상에서 근무를 한 지가 어느새 5년이 넘어간다. 아무리 다양한 일들이 긴박하게 일어나는 병원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나의 직장이기 때문에 여느 다른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이 종종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일들이 일어남에 따라 내가 직장을 다니며 근무를 하는 것이 다른 이의 하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그렇기에 아무리 바쁜 하루를 보내도, 업무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여전히 환자들을 만나는 것은 새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