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12시 개선문 앞에서 만날까요?"
말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지원이었다.
민호는 그런 지원에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원 씨는 꿈이 뭐예요?"
민호의 질문, 지원에게 꿈은 잊힌 지 오래였다.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 임신과 출산으로 나보다는 가족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던 환경에서
내 꿈을 가지고 키운다는 건 사치 같은 거라고 생각하던 지원이었다.
"글쎄요. 난 그런 거 없는데.."
말끝을 흐리면서도 지원은 어린 민호의 천진난만함이 어딘가 모르게 부러웠다.
"그럴 수 있죠! 그럼 파리에서 지원 씨 꿈을 같이 찾아봐요 우리~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도와줄게요라니..'
피식-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곧 박장대소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둥절 해하는 민호는 그런 지원을 바라보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함께 깔깔거리며 웃는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그냥 그쪽이 너무 해맑아서요."
머쓱해하는 민호였지만 싫지는 않은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금세 상기된 표정으로 쑥스러워한다.
그런 민호를 바라보는 지원은 어느새인가 민호가 편안해 짐을 느낀다.
마치 오랫동안 알던 친구 같은 느낌..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은 흐르고, 함께 온 일행과 사진을 찍고, 농담을 하고 가이드의 설명도 들으며 어느새 깊어지는 핑크빛 하늘을 마주한다.
"야경 사진을 찍으려면 체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1시간 후에 정문 첫 번째 기념품숍에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가이드의 안내가 이루어지고 각자 흩어져 식사를 하려는 찰나,
하영과 효영이 쏜살같이 달려가 민호 곁에 나란히 앉는다.
"지원 씨~ 같이 식사해요!" 그때 민호가 지나치는 지원을 붙잡았다.
"네.. 그럴까요?"
하영과 효영, 민호와 지원 그리고 가이드까지 다섯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민호오빠 번호 물어봐도 돼요?" 발랄한 하영은 민호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런 하영이 못마땅한 동생 효영은 곁에서 혀를 툴툴 차면서도 무심한 듯 그런 언니 하영을 구경할 뿐이었다.
서로의 일상에 대한 대화들이 이어지고, 좋아하는 음식부터 이상형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가 오가는 식탁.
지원은 그저 짧게 혹은 침묵으로 시간을 이어가고 있을 뿐 크게 동요치 않았다.
"지원 씨는 어떤 사람이 좋아요?" 하고 민호가 물었다.
"저는 비혼주의라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연애는 결혼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피해 가려는 지원을 민호가 파고든다.
"비혼주의자한테 그런 게 어딨어요? 언니 말고 오빠 이상형 알려주세요~" 하영이 재빠르게 질문을 가로챈다.
"저는 포용력 있는 여성이 좋아요." 민호가 답한다.
"오빠 더 자세히요~~" 효영은 언니의 질문에 보태어 민호에게 관심을 보인다.
어린 친구들의 활기와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중 지원은 그런 자리가 불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화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슈우웅~~’ 지원이 손을 씻을 때 즈음 문을 열고 들어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여성. 바로 자매의 언니 하영이었다.
“나이 먹고 그렇게 남자한테 꼬리 치면 창피하지도 않은가? 재수 없어.”
‘뭐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지원은 손을 씻으며 순간 얼음이 됐다.
“네?” 하고 지원이 되물었다.
“아~ 혼잣말한 건데, 들렸어요 언니?” 라며 냉소적인 비웃음과 함께 너무도 당차게 이야기하는 하영이다.
순간 지원은 가슴 깊숙한 곳부터 답답함을 느끼며 온몸이 굳어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말없이 화장실을 나와 자리에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뛰는 심장만큼이나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한다.
때마침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원의 뺨으로 빗물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 그렇게 지원이 터덜터덜 걸을 때 점점 굵은 빗방울이 그녀를 때린다.
평소라면 분명 별일 아닐 일이지만, 혹은 맞붙어 쏘아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원에게는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슬픈 마음뿐이었다. 오랫동안 우울함을 갖고 있던 지원이라 자신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빨간 전화부스에서 처량하게 울며 비를 피하던 그때..
문이 활짝 열리고, “찾았다. 한참 찾았잖아요~!”
민호였다.
“흑~ 으아아앙…”
민호의 얼굴을 보자 안도의 마음과 여러 복잡한 마음이 엉켜 내리는 비처럼 더 세차게 울어버리는 지원.
“왜 여기서 울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그런 지원을 걱정스럽고 의아하게 바라보던 민호는 가만히 지원을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침묵과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잠시 후 비가 그쳤다.
“미안해요.” 지원이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지나가는 비처럼 지원 씨 마음도 잠시 그랬던 거예요. “
하늘을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 같이 걸을까요?” 하고 민호가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웅크리고 앉아 울던 지원은 민호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나 그렇게 둘은 함께 걸었다.
여름의 끝자락, 한차례 시원하게 쏟아진 비로 공기마저 청량했던 그 밤,
저 멀리 예쁜 조명이 켜진 몽생미셸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그렇게 지원의 마음에 깊은 위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