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항상 ‘괜찮은 척’부터 배웠을까

적응이 빠른 사람의 기억 방식

by Late Realizations

나는 어디서든 늘 괜찮은 척을 해왔다.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환경이 바뀌는 순간에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금방 자리를 잡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나는 환경이 바뀌어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어디에 던져놔도 금방 적응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 적응을 잘한 걸까,

아니면 이전의 삶을 너무 빨리 지워버린 걸까.


환경이 바뀔 때마다

나는 지난 시간을 접어두었다.

잘 안 됐던 시기,

견뎌냈던 감정,

설명하기 어려운 기억들.


그걸 끌고 가는 대신

없는 일처럼 만들어버렸다.

망각은 생각보다 효율적이었다.

기억하지 않으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하지 않으면

굳이 상처를 다시 만질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괜찮은 척을 먼저 배웠다.

잘 지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말만 골라했다.


그게 견디기 위한 태도였는지,

아니면 그렇게 지내는 게

그저 가장 편한 방식이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헷갈린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다.

괜찮은 척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언제부터 괜찮지 않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적응은 빨랐지만

기억은 얕아졌다.

분명히 버텨온 시간은 있었는데,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은 느낌.


그래서 가끔은

문제없이 지나온 삶 같다가도

문득

내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나는

그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고 한다.

괜찮은 척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지워가며 살아야 했는지

처음으로 묻고 있어서다.


어쩌면 나는

잘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빨리 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연재는

그렇게 잊어버린 시간들을

하나씩 다시 불러보려는 기록이다.

잘 견뎌왔다는 말 대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천천히 적어보려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괜찮은 척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다음 글에서도

이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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