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재출간된 SF 소설 '에너미 마인'을 추천합니다
만약 당신이 외딴 행성에 손가락이 셋인 파충류 외계인과 둘만 남은 채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상황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두꺼비 같은" 얼굴을 보고 질색할까? 상대의 손가락이 셋뿐이라는 걸 발견하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까?
나와 다른 대상을 처음 만나는 순간에는 거부감이 드는 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불편한 동거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다면, 마냥 두려워만 하기보다는 어렵더라도 대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상상을 기발하게 풀어낸 책이 최근 출간됐다. 바로 2024년 12월 출간된 책 <에너미 마인>이다.
외딴 행성에 불시착, 외계인과 불편한 동거
<에너미 마인>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인간 '데이비지'다. 미래 인류는 우주로 진출해 여러 행성을 개척하는데, 어느 행성을 두고는 파충류 외계인 '드랙'과 갈등을 빚는다. 이에 두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전투기 조종사 데이비지는 전투에 투입된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드랙 종족의 '제리바'다. 둘은 치열한 우주 전투 끝에 각자 전투기를 잃고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 '파이린 4호'에서 정신을 차린 둘은 맨몸 격투를 벌인다. 데이비지가 제리바의 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다시 제리바가 데이비지의 양 팔을 묶어서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다 누구도 승리를 얻지 못한 채 둘은 위기에 빠진다. 섬에서 싸우던 이들을 거대한 파도가 덮치기 때문이다. 익사 위기에 처한 둘은 결국 임시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힘을 합쳐 바위 언덕 꼭대기로 피신해 우주선 잔해와 바위 조각으로 방파제를 쌓는다.
전쟁 포로가 될 각오로 어느 종족이든 구조하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몇 주 버텨보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동안 둘은 서서히 대화를 시작한다. 다른 종족의 언어 중 욕설만 배웠던 이들은 점차 상대의 언어를 서툴게나마 익히며 공존한다. 생존을 위해 협력이 필요한 만큼,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한 사람이 도우며 적에서 동료가 되어간다.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 두꺼비 얼굴의 자웅동체 외계인이 내가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고 있다. 타인의 곁을 지키는 것. - 본문 53쪽 중에서
태어난 아이, 지키기 힘든 약속 그리고...
둘이 겨우 동료가 되었을 때, 사건이 벌어진다. 자웅동체인 제리바가 임신하고, 행성에 긴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쉽지 않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데이비지는 제리바가 무사히 출산하도록 돕지만, 제리바는 출산 과정에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 제리바는 데이비지에게, '자미스'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아이를 꼭 드랙의 고향 행성으로 데려가 달라는 약속을 한다. 드랙 종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미스에게 조상 가게도를 알려주고 그를 '가계 기록 보관소' 앞에 데려가 달라는 것이다.
데이비지는 죽어가는 동료 앞에서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잔인한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왔으나, 유일한 동료 제리바는 떠났고 데이비지는 아이와 둘만 남는다. 절망 속에서 데이비지는 자미스에게 드랙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두 종족의 이야기를 모두 가르치며 서툰 육아를 해나간다.
"자미스."
"예, 삼촌?"
"자미스, 넌 드랙이야. 드랙은 한 손에 손가락이 세 개야."
나는 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들을 흔들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단언하건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자미스는 자기 손을 펴서 한동안 바라보더니 머리를 저었다.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 본문 109쪽 중에서
과연 데이비지가 자미스를 드랙 고향 행성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우주선이 망가진 마당에 행성에서 탈출하거나 구조될 수는 있을까. 아무도 살지 않던 척박한 땅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1979년 첫 출간, 1994년 국내 첫 번역 출간 후 30년 만에 다시 번역돼 출간 된 <에너미 마인>은 줄거리 내내 긴장감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또한 데이비지와 제리바, 자미스가 대화를 나누며 차츰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2024년 12월 내란 혐의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2025년 1월 현재 많은 시민이 광장에 모여 내란 가담자 체포 및 처벌을 요구하며 색색깔의 응원봉과 깃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이 시국에 <에너미 마인>을 많은 이에게 권하는 이유는,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타인을 향한 존중이자 이해일 것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여의도-남태령-한강진에 이르기까지, 탄핵 집회 광장 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탄핵이 이뤄지고 사회가 바뀌길 바란다고 말하는 중이다.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장애인, 고졸, 우울증 병력 등 다양한 정체성과 상황을 얘기하며 시민들은 젠더노소 각계각층에서 내란 사태가 책임자 처벌을 통해 종식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에서는 '탄핵 얘기만 하지, 인권 관련된 이야기는 왜 하느냐'며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발언이 섞인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탄핵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박근혜 탄핵 이후 또다시 탄핵 정국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2017년 탄핵 뒤 극우 세력이 여성, 장애인, 노조, 성소수자 혐오를 토양 삼아 세력을 키워 돌아온 결과가 지금의 내란 정국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극우 물결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걸 막자면, 개개인이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쉽게 혐오하지 않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쓴소리는 외면한 윤석열이 극우 유튜브 속 가짜뉴스에 물들어 내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반대로 낯선 타인의 말에도 귀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139쪽 중)라는 자미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광장에 모인 이들에 조금 더 마음을 열어보면 어떨까.